문화재발굴 뒷얘기-충주댐 수몰지역 조사(Ⅷ)

지표조사는 고고학도에게는 무척 흥분을 자아내게 하는 프로그램이라고 하겠다. 더욱이 현상변경으로 바뀌어지는 지형이 대상이 될 때에는 많은 긴장과 주의를 기울여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6~70년대는 국가적으로 대단위의 토목공사가 그리 많지 않았고 있다 하더라도 문화재에 대한 강력한 법규와 그 규제가 뒤따르지 못하였기 때문에 실제로 유적 조사에 대한 계획을 세우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그 예로는 팔당댐 수몰지역조사를 들 수 있다.
팔당댐이 세워진다는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연세대 박물관팀은 스스로 자체 계획을 세워 남한강?북한강의 수몰지역을 모두 답사하였다.
69년부터 71년까지 조사를 실시하면서 많은 어려움도 있었지만 값진 경험을 하였고 여기에 참여하였던 대학원·학부 학생들이 이제는 여러 대학의 각기 학문분야(고고학·인류학·사회학·한국사·동양사 등)의 중진 교수들로 성장하여 그들의 학문적 업적이 학회지나 언론 보도를 통하여 볼 때 이러한 조사를 할 수 있도록 하여 준 은사이신 손보기교수님께 깊이 감사하는 마음이다.
또한 실제로 많은 유적을 찾게 된 경험을 얻은 필자는 이러한 조사에 임하는 조사자의 자세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가를 잘 안다고 자부하고 있다. 팔당댐 수몰지역조사에 이어 대청댐 수몰지역조사를 하였고 다시 충주댐 수몰지역조사를 하는 필자에게는 중부지역 세 개의 큰 댐조사를 하게되어 큰 행운을 얻었다고 하겠다. 하여튼 여기에서 소개하는 창내 유적도 우리 고고학도에게는 좋은 교훈을 주는 유적이라고 생각한다.
80년 1월의 해는 무척 짧았고 남한강변의 매서운 바람은 우리 조사단을 상당히 괴롭혔다. 황석리 유적을 조사한 뒤 우리는 무거운 몸으로 사기리 창내나루터를 향하여 가고 있었다. 우리가 나루터 부근에 도착하였을 때 이미 겨울 해는 넘어가서 마을 전체가 초저녁의 어두움으로 깔려 있는 상태였다.
이 조사에 참여하였던 10여명의 학생들과 필자는 어떻게 하여야 할지 몰랐기에 지금까지도 그 때의 당황스러움을 기억할 정도이다.
그래서 여기에서 생각한 것이 새마을지도자를 만나 우리의 형편을 말하고 하룻밤 있을 곳을 부탁하였더니 나루터에 있는 객줏집을 소개하여서 바로 저녁을 부탁하였고 가족들이 쓰는 두 개의 방에 각기 남자대원들과 여자대원들이 묵기로 하였다.
점심을 빵으로 때웠던 우리 대원들이 약 8시간만에 새로 해준 뜨거운 저녁을 먹었을 때의 그 감회는 지금도 생각난다. 저녁을 먹고 난 뒤에 너무 피곤한 우리 대원들은 어떻게 자리에 들었는지 모를 정도이었다.
그 이튿날 주인 부부가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떠 부랴부랴 아침을 먹었다. 학생 대장인 우종윤군(현 충북대 박물관 학예연구관)이 밥값을 계산하는 동안 필자는 무료하기도 하여 강가 쪽으로 걸음을 향하였다. 바로 손질된 자갈돌 긁개를 찾아 그때까지 객줏집을 떠나지 않은 학생들을 소리쳐 불러 현장으로 오게 하여 찾은 석기가 20여 점을 넘었다.
이렇게 하여서 뒤에 창내(제천천의 한 지류)유적으로 명명된 이 유적을 찾게된 계기가 되었다. 그 이후 두세 차례 이 지역을 조사하여 여러 점의 석기를 찾은 이 유적은 강수면 88m 지점에 위치하여서 1차 발굴(82년도)대상 지역으로 선정되었다. 그런데 필자에게는 앞서 소개한 황석리 유적과 뒤에 소개할 금굴 유적과 수양개 유적을 발굴하여야만 하여 지금까지 필자와 함께 연구활동을 같이 해 온 박희현교수(청주사범대학, 현 서울시립대 사학과교수)에게 이 유적의 발굴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청주사범대학은 발굴을 해본 학생들이 전무하여 우리 팀을 양분하여 우리학생들 십여명이 조사를 이끌었다. 이렇게 조사를 실시하는 동안 정말 훌륭한 유물들이 발굴되어 발굴단을 흥분하게 만들었다. / 충북대·중원문화재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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