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발굴 뒷얘기-충주댐수몰지역조사(15)

계속 내리는 빗속으로 무거운 배낭을 지고 상진교로 돌아 왔다. 여기에서 청주로 되돌아갔어야 할 터인데 우리학생들은 앞장서서 이미 수양개 쪽으로 향하고 있지 않은가.
약 500m쯤 갔을까, 이 때 뒤에서 오는 경운기를 보고 우리 학생들은 환호를 지르며 경운기 앞으로 다가갔지만, 이 경운기는 단양(현재의 구단양)쪽으로 수해피해를 위하여 가는 길이라고 하며 우리를 비키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우리 대원들은 이미 경운기에 타 있었기에 경운기 주인도 할 수 없이 우리를 태우고 수양개 쪽으로 향하였다. 얼마 만에 타보는 문명의 이기인갉
우리들은 무거운 짐을 경운기에 놓았으나, 곧바로 수양개 나루에 도착하였다. 쉴 사이 없이 비는 계속 내리고 있는데 우리를 내려놓은 경운기는 가버렸다. 강을 보니 전쟁이나 난 듯이 시뻘건 강물이 심한 파도를 일으키며 우리를 삼킬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이쯤 되면 돌아가는 것이 상식이고 이것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필자는 얼마나 미친 짓을 했는지 지금도 후회하고 있다.
이미 불어난 강물로 묻혀버린 나루터를 보면서 강 건너를 보니 손바닥만한 배가 있는 것이 보였다. 이 배를 본 학생들은 저 배로 가면 되겠다는 생각으로 “배 좀 건너 주세요”라며 다 똑같이 소리쳐댔다. 필자가 하는 일은 겨우 “하나, 둘, 셋”하는 것이었고, 학생들은 “배 좀 건너 주세요”라고 외치기를 아마 십분 쯤 했을까, 우리는 목이 터질 것 같았고 힘이 빠졌다. 그리고 이쯤 되어서는 청주로 되돌아갔어야만 했을 것이다. 불을 들고 화덕구덩으로 가듯 무모한일을 또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결국 나룻배 옆에 조그만한 움막집에 어떤 한 사람이 나와서 우리보고 되돌아가라는 손짓을 하였지만 우리는 거기에 사람이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고 용기를 내서 앞에서 있었던 소리치기를 계속하였다. 지쳐서 되돌아가자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을 때, 움막집에서 두 사람이 나오는 것을 목격하고 우리들은 모두 박수를 치며 기뻐하였다.
이 두 사람은 손바닥만한 배의 노로 힘들게 강을 건너오고 있었다. 얼마쯤이나 걸렸을까. 그들이 좀 더 가까이 왔을 때는 힘든 노젓기로 생긴 땀인지 빗방울인지 모를 힘든 모습이었는데, 이를 보고 우리 모두는 숙연한 마음을 갖게 되었고 나 자신은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우리 쪽에 도착한 뱃사공 두 분을 보니 한 분은 연세가 듬직한 할아버지 이셨고 또 한 사람은 청년이었다. 할아버지는 내리자마자 “죽으려고 그러느냐” 욕을 바가지로 하는데도 우리는 모두 숨죽이고 있었다. 죄를 지었으니…
그 사이 우리 학생들은 이미 배에 올라타 있었다. 결국 할아버지는 우리를 태우고 다시 강 건너로 가기위해서 노를 젓는 작업을 하였다. 필자는 모든 대원들을 앉아서 절대로 움직이지 말라고 하고 난 뒤에 눈을 감았다. “내 분명히 이 곳에 큰 일을 해놓으리라. 무사하게 건너가게 해주기를 빕니다” 하는 마음으로…
할아버지에게 깊은 사죄와 큰 사례를 치루고 우리 대원들은 앞에 보이는 뚝 위로 올라가 보았다. 거기에는 콩과 고추, 감자를 심은 밭이 있었고, 그 위로 민가가 보였다. 어제부터 겨우 빵과 우유, 라면으로 허기를 때운 뒤라 학생대표 우종윤군(현 충북대학교 박물관 연구관)이 마을로 가서 밥(점심)을 부탁하는 사이 우리 몇은 밭을 보았다.
그랬더니 이게 웬일인가! 콩밭에서 검은 셰일로 만든 격지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닌갉 그 옆에도 검은 셰일의 격지와 석기들이 널려 있는 것을 보고 우리 학생들께 “검은 돌만 찾아라” 하니 바로 이어서 “여기도 있어요” “여기도요” 하는 이야기가 여러 군데에서 계속되었고, 이를 본 우리들은 지금까지의 추위와 배고픔을 다 잊어 버렸다. 약 1시간동안 100여점의 석기를 채집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 충북대·중원문화재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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