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발굴 뒷얘기-충주댐수몰지역조사(17)

이때 발굴에 참여한 충북대학교 조사팀은 지금 생각하여 보아도 아주 막강한 조직이었다고 생각한다. 계속되는 두루봉 동굴 발굴로 발굴의 정밀성과 기록의 정확성에 대하여 이미 꽤 숙련된 데다가, 황석리 유적과 창내 유적과 같은 한데유적을 발굴하여 본 경험에서 웬만큼의 자신도 있었다.
이때는 주로 역사교육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사단이 구성되었다. 그 가운데 졸업하였으나 아직 발령 대기 중인 졸업생들, 특히 하문식(현 세종대교수)·이충섭(현 울산에서 고교교사)·이윤제(현 인천에서 교사)·윤기준(청주외고 교사)·김옥현(괴산고교 교사)·최경희(진주에서 교사)·구금회(보은에서 교사) 등의 3회 졸업생과 4회 졸업생인 김석훈(문학박사, 인천과학교 교사)·우장문(문학박사 취득예정, 발안실업교 교사)·박문숙(성남에서 교사) 등, 5회 졸업생인 홍순두(충북대사대부고 교사)·류호일(충주에서 교사)·김진용(청주 남중 교사) 등이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그리고 83년 입학생들은 필자가 지도교수를 맡게 되었는데 이 때부터 적극적으로 발굴조사에 참여한 조상기(중앙문화재 연구원 학예실장)·윤용현(국립중앙과학관 학예연구관)·이경숙(신탄진 중학교 교사)·임규순(서울에서 교사) 등은 당시 신참으로 참가하여 능력을 보였다. 이 외에도 많은 학생들이 참가하여 고생을 같이 하였다.
83년도 발굴에는 바로 유적 가까이에 있는 이장댁에서 식사를 하도록 하여 여러 가지 편의를 보았다. 마을주민들의 발굴 참여 문제와 또 제대로 보상되지 아니한 땅의 사용 문제, 강을 건너다니는 배의 사용 문제 등 여러 가지 편의를 받았다. 특히 이 때 식사 중에 기억나는 것은 그 유명한 마늘을 매일 매끼마다 맛있게 먹다보니 보름이 지난 다음에는 대원 여럿이 배탈이 나기도 하였다. 이것은 마늘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고 마늘과 같이 먹었던 매운 고추장 때문에 그렇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발굴장 옆에 있는 새마을회관을 빌려 쓰도록 동네에서 배려해 준 점도 감사하고자 한다. 이미 앞에서 양평 앙덕리 고인돌 때 물난리를 설명하였지만, 이 동네는 이 때 있었던 홍수로 마을 전체가 떠내려가는 불행을 겪었기 때문에 다시 위쪽으로 집단으로 마을을 만들어서 살고 있었다. 가구수가 적고 인구가 많지 않은, 또 농지가 부족한 전형적인 단양의 산골 마을이었다.
그런 마을에서 공용으로 쓰고 있는 건물로는 새마을회관 밖에 없었는데 박정희 대통령 때는 새마을 운동이 크게 붐을 일으키고 국민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으나, 그 이후로는 여건과 상황이 바꾸어지게 되면서 관심이 떨어져 이 곳의 새마을회관도 조락해가는 상태이었다.
그렇다고 하여도 전기불이 들어오는 넓은 회관에서 유물을 정리하고 토론할 수 있고, 손님을 접대할 수 있다는 것은 무척 기분 좋은 일이다. 지금까지 필자가 충북대학교에서 발굴한 유적은 발굴에서 이렇게 넓은 건물을 쓴적이 없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일을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건물 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필자가 충주댐수몰지역 조사 단장을 맡아 임무를 수행하여야 하였기에 발굴에만 전념하지 못한 아쉬움을 갖고 있다. 그 전 해(82년)에 경희대학교 조사팀에 참가했던 대원 한 명이 익사했던 일이 있어서 10여개의 유적에서 발굴이 진행되는 동안 필자는 제일 먼저 조사단의 신변안전과 발굴의 원만한 진행을 목표로 생각하고 일을 추진하다 보니 현장을 떠나는 횟수가 많게 되었다.
이때 충주댐조사단 본부에는 전용차(포니)가 있어서 다른 현장들을 수시 방문할 수 있었고 연락관계를 자주 할 수 있었던 것은 故 이태련 선생과 윤덕현 선생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이 선생은 주로 현장작업 사진을 남기는 일을 맡아 해주었고, 윤선생은 고고학조사 진행에 서무를 맡아 해주었다. 또 이러한 일들을 도와주었던 보은의 윤기사(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가 낡은 차를 끌고 포장되지 아니한 길을 다니느라고 무척 고생하였다. / 충북대·중원문화재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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