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발굴 뒷얘기-충주댐수몰지역조사(18)

1차 발굴에서 구석기 유물이 요새말로 ‘대박’이 터졌다고 할 정도로 많이 출토되었다. 먼저 답사에서 표토로부터 30cm도 안들어가 유물포함층이 확인되었고, 이 층에서 많은 양의 유물이 집중되어 있음을 알고 있던 터라 기대는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많이 나올 줄은 몰랐다. 더욱이 유물의 출토와 석기 제작행위를 알 수 있는 모룻돌과 망치, 그리고 그 주변에 많은 격지들이 밀집되어 있어서 부합할 수 있는 자료들은 우리 연구진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더운 여름철 열악한 조건에서 발굴을 진행하고 보니 모든 대원들의 건강은 말이 아니었다. 발굴하면서 소모하는 열량에 비하여 식사를 통하여 받아들이는 열량이 많아야 함에도 많은 대원(학생)들이 참가하고 보니 적자를 볼 수 밖에 없어서 발굴을 책임 맡은 필자로서는 매번 예산 때문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가운데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것은 바로 수양개 유적이 남한강가에 있다는 사실이다. 발굴하면서 보니까 우리가 묵고 있던 집주인인 이장은 당시 면이나 군 관계자들이 애곡리 마을을 찾아오면 그물로 투망하여 잡은 물고기로 매운탕을 끓여서 대접하는 것을 보게 되었고 실제로 우리도 그 대접을 받기도 하였다.
그래서 발굴하다 지치면 모든 대원들이 푸른 물의 남한강으로 가서 수영을 하기도 하고 몸을 씻기도 하고, 또한 올갱이를 잡기도 하였다. 잡은 올갱이는 우리들 모두에게 즐거운 시간을 갖게 하였으며, 이 올갱이는 다음에 다시 얘기할 ‘수양개 주먹도끼 만드는 사람’(김수현교수 작)의 목걸이 장식에 중요한 힌트를 안겨 주기도 한다.
이렇게 하는 동안 많은 유물이 출토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수양개유적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우리 학교의 교수와 학생들은 물론이거니와 충주댐 수몰지역 조사의 진행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조사단을 구성하여 실시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끌었기에 전국의 고고학도들이 일부러 현장답사를 오기도 하였다(이렇게 되자 뱃사공 주인은 수입이 좋다고 하여 우리에게 일부러 감자를 삶아 가지고 오기도 하였다).
하여튼 이러한 가운데 조사단이 해야 할 일은 더욱 많게 되었다. 방문자들의 스케줄과 답사 후의 보도문제(특히 당시에는 보도제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에 대한 여러 가지 신경 쓰이는 일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1차 발굴에서 빼놓지 않고 써야할 것은 바로 사학과 학생들의 합류이다. 83년도에 처음으로 학생을 모집한 사학과는 당시에 우수한 학생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 과 학생들도 같이 발굴에 참여하여 큰 힘이 보태지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이윤석(진천 군청 문화관광과)·노병식(한국문화재보호재단 책임연구원) 등이 적극적인 참여를 하였고 성실성을 인정받아서 지금도 고고학의 길로 가고 있다.
여기에서 돌아가신 연규횡 총장님 얘기를 하도록 하겠다. 연총장님이 학장으로 계실 때 필자가 충북대학에 교수로 채용되면서 인연을 갖게 되었다. 당시 박물관이 바로 본부 건물 3층 총장실로 가는 길목에 있어 연총장님은 학장과 총장으로 재임하시는 동안 수시로 박물관을 들르시곤 하였다. 다시 말하면 어느 때, 어느 시각에 들르실지 몰라 우리 모두는 긴장한 채로 대기상태이었다고 하겠다.
연총장님은 곧잘 필자를 데리고 시내구경(다방과 기원 등)을 다니시기도 하였으며, 자신의 고향인 괴산 도안을 가자고 하시면서 1호차(총장님 차)를 타게 되는 기회가 자주 있었다. 그로해서 주위의 여러 교수들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다.
연총장님은 우리 문화재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고 계셨던 분이다. 이미 충북대학이 단과대학 시절에 매장문화재 보관처로 지정받게 하였으며, 실제로 학장으로 계시면서 박물관장을 겸임하시기도 하셨기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신 분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박물관에서 실시한 모든 조사에는 꼭 방문하여 주셨고 실제로 충북댐수몰지역조사의 여러 유적에도 위로방문 하여 주시기도 하였다. 이 자리를 빌어서 고인의 큰 격려에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자 한다. / 충북대·중원문화재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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