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발굴 뒷얘기-충주댐수몰지역조사(19)

수양개유적 조사와 함께 다른 많은 수몰지역조사도 함께 진행되었다. 이러한 연구 결과들을 묶어서 발굴보고서를 내는 일도 처음 있는 일이라 무척 힘든 형편이었다. 당시 박물관의 인력으로는 벅찬 일이었지만 그 일은 당시 조교였던 우종윤선생을 비롯하여 하문식·김석훈님 등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이렇게 하여 ‘83 忠州댐 水沒地區 文化遺蹟 發掘報告書’(4×6배판, ○○○쪽)을 발간하여 학계에 보고하였다. 이렇게 연차발굴을 끝낸 뒤에 종합적인 발굴보고서를 우리들은 최선을 다하여 기일 안에 연구결과물을 제출하였다는 점에서 뿌듯한 감회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수몰지역 조사에서 문제가 생겼다. 발굴이 실시된 여러 유적에서 미진한 발굴이었다고 하는 책임조사원들의 주장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조사단장인 필자는 지도위원회에 이 사실을 말씀드렸지만 여러 위원들은 이미 정해진 규정이기 때문에 할 수 없다는 그러한 말씀이셨다. 다시 말하면 발굴 연장에 대한 아무런 조처가 취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결코 풀기 쉽지 않은 문제이어서 다음 세대로 남기자는 얘기까지 하시는 위원들도 계셨다.
그러나 실제로 수몰지역내 유적은 수위가 몇 십 미터 위로 되어서 예를 들면 창내나 황석리유적 같은 곳은 댐으로 있는 한은 영원히 다시 나올 수 없는 약 40m 내지 50m 물속으로 묻혀버렸기 때문에 이것은 완전히 발굴을 포기하자는 뜻과 같았다.
지도위원들의 의견이 이와 같았을 때 다시 책임조사원들을 소집하여 의견을 물어다시 본 결과 그들은 단호하였고 실제로 발굴연장을 요구하였다. 이렇게 되자 필자는 다시 지도위원회를 소집하였고 설득하여 도 당국자와 만나 이 문제를 풀어나가자고 하는데 까지 의견을 도출하였다.
한편 수자원공사를 설득시키는 것도 문제였다. 우선 보상과(과장 추행지)를 이해시켜야 하였는데 추행지 과장은 선뜻 응하면서 조사단장인 필자를 이끌고 공사부 이희승 부장을 만나도록 해주었다. 이들 두 주무관계자들이 이해되고 우리 조사단의 견해와 같은 의견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들로서는 백만대군을 얻은 셈이었다.
실제로 이희승 부장은 충청북도 도청 기획관리실장을 친히 방문하여 유적조사의 필요성과 여기에 대한 협조 방향을 제시해 주기도 하였으나 실장은 박무가내로 거절하였다. 돈을 준다는 쪽이 오히려 돈을 달라고 하는 쪽을 방문하여 주겠다는 얘기를 하는, 도저히 우리로서는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하였음에도 충청북도는 고집을 부리곤 하였다.
그래서 당시의 문화재 과장과 기획실장은 입장이 완고하여 필자의 의견이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매번 만날 때 마다 감사 대상이라고 하는 얘기로 필자의 견해를 묵살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감사에서 지적되고 우리가 옷을 벗어야 된다몤라는 강력한 말로 필자 뿐만이 아니라 조사단의 건의를 묵살하곤 하였다. 이렇게 되다 보니 조사단에서는 감사 책임자를 만나야 된다는 이야기가 나와서 당시의 감사원 황영시원장을 만나는 일까지 추진되었고 이 일은 금굴 발굴자 책임조사원이었던 손보기 교수께서 추진하셨다.
실제로 손보기 교수는 황원장이 육군참모 총장 시절에 여러 가지 도움을 주셨고 이러한 인연으로 좋은 관계를 갖고 계셔서 면담이 성사되었다. 필자는 충주댐수몰지역조사에 대한 종합 보고서와 함께 사진자료 등 한 보따리를 들고 감사원으로 갔다. 출입부터가 무척 힘들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이미 부속실에서 연락하였음인지 손박사님과 필자를 정중하게 2층으로 안내하였다.
우리를 맞이하는 감사원장은 구척장신이었고, 악수를 하는 그의 손은 쇠팔뚝 같았다. 손보기 교수의 근황과 연구에 대한 이야기, 육군본부에서 ‘한국사’의 제작 당시에 대한 회고담이 한참을 이은 뒤에, 황원장은 필자에게 “어떻게 이교수께서 어려운 걸음을 하셨습니까몤라고 필자에게 말문을 열도록 하였다. / 충북대·중원문화재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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