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발굴 뒷얘기-충주댐수몰지역조사(21)

4차 발굴이 계속되는 동안 수양개 부락에는 모든 집이 철거되어 주민들이 하나도 없는 마을에서 우리 발굴 대원만 40여명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행된 발굴인지라 무척 쓸쓸하기도 하고 한적하기도 하였지만 모든 대원들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누구하나 불평하지 않고 발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렇게 하여 발굴장의 면적이 1,250㎡라고 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단일 발굴장이 만들어졌고 여기에서 발굴된 유물수가 약 3만점에 다다른다. 우리나라 구석기 역사상 유례가 없는 발굴성과를 세웠지만 당시로서는 그러한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오로지 발굴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우리 인부 중의 하나가 조금 전까지 리어카를 나르는 길을 만드느라고 벽을 정리하였는데 멀리서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리는 기분이어서 뒤를 보니 조금 전까지 벽을 정리하던 인부가 없어진 것이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현장을 가 보고 일하던 인부가 흙 속에 묻혀버린 것을 알게 되었다. 충주댐 수위가 올라오면서 파놓은 흙들이 습기가 차서 무너지는 현상인 것을 그제서야 알게 되었고 바로 인부를 꺼낸 뒤 발굴하고 있는 이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마음은 바빠졌으나, 그래도 지도위원을 모셔야겠다는 생각으로 당시 고고학 분야의 지도위원이신 김원용 교수께 전화를 드렸더니 오시기 어렵다는 말씀을 남겨서 철수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통화한지 3일 후에 나루를 건너오시는 분이 김원용 교수인 것을 측량기를 통하여 확인하고 부랴부랴 김교수님을 마중하러 나룻가로 뛰어갔다. 경주에 들리셨다가 이 곳 단양까지 오셨다는 말씀이시다.
김박사님은 자신이 즐겨 쓰시는 여름모자와 윗옷을 둘러메신 채로 걸음을 재촉하여 유적을 보시었다. 이미 석장리 유적 발굴시부터 모셨던 터라 선생님의 안내는 편한 마음으로 모셨다. 넓은 유적과 유적 전면에 깔린 많은 석기들, 그리고 특히 모룻돌 주변의 망치와 격지들을 보시면서 “사람이 살다가 금방 자리를 비운 것 같구만요” 하시면서 어떻게하면 이 유적을 보존할 수 있는가 하는 걱정을 하셨다. 그러시면서 “대통령을 만나는 일 말고는 모든일을 도와 드리리다”라고 약속하셨다.
우리 대원들은 철수 준비를 하고 난 뒤 많은 유물들을 배에 실어 보내주고 철수를 하였다. 다시 못 볼 유적이라고 생각하니 지금까지 있었던 많은 감회가 눈물로 나타났다. 우리가 철수한지 이틀 후에 엄청난 폭우가 와서 우리가 조금만 늦게 철수 하였으면 다시 물 속에 갇힐 뻔 하였다.
그 후 김원용 교수는 조선일보 문화부의 김태익 기자(현 논설위원)를 만나 수양개유적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대담을 신문 한 면에 실렸고, 또 조선일보는 ‘단양 수몰유적을 살려라’라는 사설을 쓰기까지 하였다. 그 날 바로 문화재관리국에서 주무과장이 현장을 방문하여 여러 가지 방안이 모색되었지만 이미 댐 수위는 차올라 오고하여 결국 문화재 위원회에서 전시관 건립 내용이 검토되기도 하였다. 하여튼 이 수양개유적은 이렇게 하여 다시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고 많은 선사고고학자들의 뇌리에 남게 되었다.
이렇게 한 발굴결과 보고는 금굴유적과 합하여서 연장발굴 보고서로 발표되어 지금까지도 구석기문화의 글들에는 수양개유적 소개와 함께 이 보고서가 소개되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렇지만 내년이면 발굴이 끝난지 20년이 되는 해인데 아직까지 종합보고서를 학계에 제출하지 못한 막중한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 이 문제를 해당기관의 장들께 여러 차례 간곡한 부탁을 하였지만 아직도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한국학술진흥재단에서 3년간의 연구비를 받았고 이 연구에 관계되는 여러 학자들이 참가하여 연구를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내년에는 꼭 빛을 보도록 만들 생각이다. / 충북대·한국고대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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