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발굴 뒷얘기-구낭굴 조사(3)

1차 조사의 성과 중 인상 깊은 자료는 호랑이 발가락뼈인데, 여기에는 발굴장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사연이 있어 종종 이야기하곤 한다.
발굴이 진행되던 어느 날, 마을에 살고 있는 노인 한분이 발굴현장까지 오셨다. 동리에서 발굴이 진행된다는 소식을 듣고 과연 무엇인가 궁금하여 올라왔다는 말씀에 필자는 여느 방문객을 맞을 때와 같이 차를 한 잔 권하였고 발굴된 유물들 가운데 몇 가지를 열심히 설명해 드렸다. 그러던 가운데 발굴된 호랑이 발가락뼈를 보여주었더니 아주 의외라는 표정으로 어떻게 호랑이뼈가 여기에서 발굴되었는지 질문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발굴현장 즉 굴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고 뒤이어 물으셨다. 그러나 당시 우리는 굴의 발굴에만 신경을 썼을 뿐 굴이 어떻게 불리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기에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필자의 대답에 할아버지는 굴의 이름과 그에 얽힌 전설을 천천히 들려주었다. 굴 앞에는 바위가 솟아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호랑이바위, 굴은 구낭굴로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전설에 따르면 오래전 옛날, 굴에는 아홉 형제와 함께 홀어머니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홀어머니가 장에 가면서 맏아들에게 동생들과 함께 집을 잘 보라는 부탁을 하며 어느 누가 와도 문을 열어주지 말라는 당부를 하고 집을 나섰다. 어머니가 외출하는 것을 숨어서 지켜본 호랑이가 굴 앞에 다가와 몣엄마가 왔다몤라고 변성하여 흉내를 내고 드디어 큰 아들을 나오게 한 뒤에 아홉 아들들이 결국 모두 호랑이 밥이 되었다는 슬픈 전설이었다.
이렇듯 사람이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전설이 있는 구낭굴에서, 오히려 사람에게 잡힌 호랑이 발가락을 찾았다고 하니 노인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호랑이 전설과 발굴된 호랑이 발가락 사이에는 고고학적으로 혹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어떠한 관계를 이야기하기는 힘들겠으나, 그 놀라운 문화적 유추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전설이 갖는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필자는 구낭굴을 소개할 때마다 이 할아버지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며 그 분께 감사한 인사를 빠뜨리지 않는다.
호랑이 발가락뼈의 발견 외에도 구낭굴 1차발굴이 갖는 의의는 발굴장에서 나온 흙을 세심하게 물체질하여 크기가 작은 고고학 자료를 찾았다는 점에 있다. 복잡하고 쉴새 없이 진행되는 발굴현장에서 작은 짐승뼈와 같은 유물들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놓치기가 쉽다. 그렇듯 그냥 내어보낸 뼈 유물의 조각과 화석 그리고 작은 짐승뼈 예를 들어 토끼이빨, 박쥐이빨 등과 같은 이빨을 찾는데 주안점을 두고 물체질을 열심히 하였던 현장이 바로 구낭굴이다.
필자가 이전에 먼저 발굴하였던 두루봉에서 이러한 방법을 실시하지 못하였기에 그 당시의 전체적인 동물상을 복원하는데 필연적인 한계가 있음을 절감하였고, 구낭굴 발굴에서는 역사교육과 1학년생 권기윤 군에게 맡기어 물체질에 전념하도록 하였다. 권군 본인도 이 일에 대한 깊은 관심과 책임감으로 동굴의 박쥐뼈를 찾는데 열심히 노력하였으며 그 결과 또한 주목할 만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우리는 구석기시대 구낭굴의 동물상 연구에 절대적인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발굴이 진행되면서 많은 뼈 화석들 중에서도 사슴뼈들이 불탄 채 숯과 함께 출토되어서 우리 발굴팀에게 보람을 주었으며, 또한 사람 손가락뼈를 찾게 된 것도 중요한 성과였다. 이 사람뼈는 애초에 우리 발굴단에서 발견하지 못하였던 것인데, 현장을 방문한 연세대학교 대학원 제자인 최삼용 님(현 연세대학교 박물관 연구원)이 발굴장을 살펴보는 가운데 찾아내어 뜻하지 않은 큰 기쁨을 안겨주었다. 동시에 우리 발굴단원들에게 1차분류가 얼마나 중요한 작업인지 새롭게 경각심을 갖게 하는 좋은 계기였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1차발굴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무척 힘들게 진행되면서도 이전에 우리 학계에 소개되지 않았던 새로운 처녀굴을 발굴하여 중요한 성과들을 얻었기에 우리 발굴팀은 무척 기쁜 마음으로 귀교할 수 있었고 여름방학을 보람차게 보냈다는 점에 우리 학생 대원들도 뿌듯하였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발굴에 참여하여 고생한 모두가 옥화대에 가서 하루를 맘껏 즐기고 놀았던 기억이 난다.
끝으로 구낭굴 1차발굴장에서 만난 정하모 당시 공보실장(전 단양군수)은 구낭굴의 발굴과 연구가 갖는 의미를 이해하게 되어서 충북대학교 박물관팀이 수양개와 구낭굴을 발굴하도록 기회를 만들어주는 인연을 갖게 되어 필자는 지금도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다. / 충북대·한국 고대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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