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발굴 뒷얘기-구낭굴 조사(6)

구낭굴 보고서를 낸 후 박선주 교수와 필자는 몇 차례 여러 학회를 통해서 구낭굴에서 발견된 동물상 특히 곰과 원숭이에 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하여 구낭굴에 대한 인식을 높이도록 노력하였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발굴 면적이 좁고 출토된 유물수에 대한 전체적인 해석을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다보니 이 조사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느꼈지만 아무런 대책을 세울 수 가 없었다.
이러할 때 95년에 다시 박물관장으로 임명되면서부터 학술적인 조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는데 이것은 바로 민선군수로 당선된 정하모 군수의 선사문화에 대한 이해와 같이 출발할 수 있었다. 정군수는 다음에 이야기하겠지만 수양개 4차 발굴이 끝난지 10년만에 5차 발굴을 실시하게 되는 예산을 마련해 주고, 이어 6, 7차 발굴을 할 수 있도록 예산을 만들어 주었다(여기에 대해서는 다시 설명할 것이다).
그런데 수양개 유적에서 새로운 사실의 변화는 박물관을 짓는 계획이 추진되었는데 이 때 수양개 박물관 건립 예정지에 대한 조사계획을 세웠으나 여러 사정 때문에 이 예산을 반납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을 알고 현 군수인 이건표 군수의 특별한 배려로 예산 전용을 할 수 있게 해주어 구낭굴에 대한 3차 발굴을 실시할 수 있게 되었다.
더욱이 연세대에서 제천 점말 용굴출토의 뼈유물로 석사학위를 맡고 불란서의 세계적 구석기 학자인 앙리 드 룸리 교수의 지도로 고고학 박사학위를 얻은 조태섭 박사가 귀국하면서부터 여기에 대한 새로운 계획을 수립할 수 있게 되었다.
98년의 늦은 가을의 발굴인데다 단양의 깊은 산골짜기에 있는 구낭굴 조사는 역시 힘든 것이었지만, 이때 주위의 여러분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지금 생각해봐도 무척 행복한 시간들이었다고 하겠다.
우선 당시 가곡면의 양수자 면장은 필자와는 30년 전에 서울 절두산 기념관 전시 관계로부터 알게 된 사이었고 수양개 조사시 사회복지과장으로 있으면서 여러 문제 특히 자원봉사자들의 동원에 적극적으로 협조를 해왔던 터이라 어려운 부탁을 할 수 있는 형편이었다.
특히 예산상의 어려움과 인력 동원의 어려움이 겹쳐 있던 형편에서 3~5명 정도의 사람들을 면에서부터 차출하여 발굴을 돕도록 하였다는 사실은 우리 의 큰 짐을 덜어준 셈이었다.
비록 전문가가 아니고 본인들이 실제로 원한 일이 아니어서 간혹 우리 조사단원들을 피곤하게 만든 때도 있었지만 그들의 노력으로 조사단원들이 실제 발굴 조사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하여 주었다는 점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리고 그들의 공로를 치하한다.
또한 매포중학교에 근무하는 필자의 제자인 홍순두 선생은 고등학교 입시가 끝난 3학년 학생들을 우리 현장에 보내주어 찾기 어려운 박쥐뼈를 찾는데 혁혁한 공로를 세우기도 하였다.
또 이때 잊을 수 없는 좋은 제자는 졸업을 앞둔 양정희 님(현 진천농협 근무)이 실제로 우리의 식사를 만들어 주는 육체적인 노동을 한달 이상 하여 주었다는 점은 지금까지도 고마움을 갖게 한다(그래서 결혼할 때 주례를 서주어서 마음의 빚을 갚았다).
한편 조박사는 새로 산 찝차로 구낭굴 입구의 문턱까지 올라오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어서 우리 대원들의 많은 노력과 시간을 덜어 주었다(차가 망가진 보상비를 제대로 계산해 주지 못한 것은 지금까지도 마음의 빚으로 남는다).
이 발굴에는 1학년 학생 황해경·이수정이 참가하여 도면작업, 유물수거 그리고 등록과 같은 기초적인 작업을 도맡아서 하여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인적 구성과 함께 발굴한 이 구낭굴 조사에는 역시 40년 동안이나 필자의 발굴에 참여하였고 이제는 친구로 사귀고 있는 김희환·김종근 선생 등이 노련한 발굴 방법으로 상당히 많은 문화적 성격을 찾는데 노력하여 주었다.
이 발굴 결과를 갖고 12월 28일 이건표 군수를 비롯한 군관계자, 단양군민 그리고 여러 학계의 관계자들이 모여 성대한 발표회를 갖을 수 있게 되었던 사실에 다시 한번 이 군수에게 감사한다. / 충북대· 한국 고대학회 회장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