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발굴 뒷얘기-중부고속도로 조사 (2)

곤지암에서 남이분기점까지 걸쳐있는 중부고속도로 예정선에 분포된 유적을 배당하는 기준으로 곤지암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궁평리 유적은 손보기교수(연세대)에게, 서청주 톨게이트 근처에 있는 향정동 유적은 윤무병 교수(충남대)에게로 맡기어 두 원로 교수에 대한 예의를 표시하기로 하고 나머지 유적들은 책임조사원들의 전공별로 배정하였다.

그런데 애초 강인구교수(한국정신문화연구원)가 맡았던 내곡동 유적에 발굴팀이 들어가기 전에 공사현장팀들이 유적을 훼손한 사건이 발생하여, 강교수는 발굴 참가를 거부하였고 또한 이 문제를 문화재 관리국에 제소하겠다는 강력한 항의로 조사단은 할 수 없이 충북대 박물관 학예부장으로 있던 차용걸 교수에게 유적을 맡기기로 하고 책임조사원을 교체하였다(지금 돌이켜 보아도, 발굴에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는 강교수와 발굴조사를 함께하지 못하게 된 것은 무척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 사건에 이어, 궁평리유적에서는 발굴조사팀들이 비 때문에 현장을 비운사이, 공사장에서 나오는 엄청난 양의 흙을 그대로 유적 위에 부어버려 유적이 없어진 일도 생겼다. 그래서 도로공사의 관계부장이 손보기교수를 찾아가 직접 사과하고, 묻어버린 흙을 다시 퍼내는 해프닝도 있었다.

이러한 몇 가지 일들이 있었지만, 대체로 발굴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연구 성과를 올리게 되었다. 궁평리 유적에서는 청동시 시대의 유물과 고구려 계통의 무덤 흔적을 찾아 그 곳의 복합적인 문화성격을 밝혀내었고, 필자는 음성 양덕리 고인돌 유적을 발굴하여 이동된 굄돌을 원상태로 복원하고 이들 석재의 원산지를 찾아내어, 당시 사람들의 큰돌(居石) 문화연구에 한 자료를 제공할 수 있었다.

또한 최병현교수(한남대)는 진천 삼룡리 백제 가카터 유적을 발굴하여 대단한 성과를 올렸다. 이 유적을 통하여 지금까지도 학계에서 큰 숙제로 남아 있는 서울 석촌동 일대에서 많이 출토되는 백제 토기에 대한 관계 자료를 설명할 수 있게 되었고, 더 연구를 진행시켜 이 가마터를 중심으로 주위에 분포한 비슷한 시기의 여러 가마터들을 확인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그의 업적이라고 하겠다.

바톤 터치하여 늦게 발굴을 시작한 차용걸교수는 신봉동 발굴을 통하여 익힌 여러 가지 발굴 방법을 동원하여, 청주 내곡동 집터가 아주 완전한 네모꼴이고 또한 화덕자리도 반듯한 네모꼴이었음을 밝혀냈고 가락동 계통의 완전한 토기와 그물추 등을 찾아냈다. 미호천을 배경으로 살았던 청동기 시대 사람들의 완전한 생활을 복원할 수 있는 절대적인 자료의 발전으로 이 유적은 가락동 계통으로 이어지는 청동기 문화상 연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문명대 교수는 내곡동 집터와 멀지 않은 곳에 떨어져 있는 곳에서 출토된 기와를 중심으로 발굴을 계속하다가, 거의 완전한 고려 초기의 석불을 발굴하여 청주지역의 용두사나 사뇌사 등과 같은 고려 초기의 불교문화 연구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거동이 불편한 몸으로 직접 발굴에 참여한 윤무병교수는 그의 섬세한 발굴 방법을 통하여 지금의 서청주 톨게이트 잔디밭에서 긴 네모꼴의 완전한 집터를 발굴하였는데, 여러 가지 문화 흔적으로 보아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시대의 집터인 것으로 해석하여 과도의 문화상 연구에 좋은 자료를 제공하였다.

이와 같은 조사단은 훌륭한 연구 성과를 얻었지만, 우리나라에서 처음 이루어진 고속도로 조사에서 차후 이들 자료를 어떻게 할지에 대한 기본적인 대책을 강구하는 일은 간단하지 않았다. 이에 조사단은 책임조사원들과 함께 여러 차례 회의를 가졌고 이전 이화여대 박물관 팀이 발굴한 광주 번천리 가마터 발굴의 경우와 같이 도로 선형을 바꿀 수는 없다는데 의견을 같이 모았다.

결국 한 동한 적당한 방법을 찾기 위해 토의를 계속한 후, 어느 교수가 내곡동 집터와 향정동 집터를 수지(FRP)로 떠내는 방법을 제시하여 이들 내용을 지도위원회를 거쳐 조사단의 의견으로 도로공사에 제출하였으나 도로공사 관계자는 불가방침을 완강하게 밝혀 조사단의 노력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 충북대학교 박물관장 이융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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