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센트럴 파크에선 여름철이면 음악회가 자주 열린다. 세계 3대 테너의 하나인 프래시도 도밍고는 가끔 이 프로에 출연하여 청소년들과 호흡을 함께한다.

알프스 산맥으로 둘러싸인 오스트리아 굽스타인에는 8백년된 옛 성이 있는데 여름철이면 갖가지 음악회의 선율이 절벽을 타고 흐른다. 지난 여름에는 역시 세계 3대 테너의 하나인 호세 카레라스가 이곳에서 독창회를 열었다.

이 옛 성의 음악회는 청주와도 각별한 인연이 있다. 대청호환경미술제에참가한 오스트리아 작가 알로이스 쉴드와 이 축제의 큐레이터로 있는 루드빅 프랭크의 주선으로 청주대 이경희 교수팀이 서양의 고성에서 대금 연주등 국악의 향연을 펼쳐 갈채를 받은 바 있다.

새 천년으로 접어들며 여러가지 예술행사는 장소에 구애를 받지않는 파격적인 양상으로 치닫는게 세계적 추세다. 극장이라든지 무슨 전당같은 전용무대에서 일탈하여 열린 무대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일예를 들면 프랑스의 아비뇽 연극제도 채석장이었던 「절벽 극장」등에서 열리고 있지 않은가.

이런면에서 봤을때 충북도청이 지난 7월부터 기획하여 열띤 호응속에 열리고 있는 도청의 정원음악회는 형식파괴, 권위파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겨냥하며 도민의 품속으로 잦아들고 있다는 점에서 신선한 문화충격으로 풀이된다.

사실 따지고 보면 도청의 정원은 개인 소유물이 아니라 세금을 또박 또박 내는 도민의 마당이요 도민의 쉼터다. 그런데에도 권위주의에 젖었던 지난날, 도청의 정원은 쇠창살과 철문으로 인하여 도민의 접근을 차단했었다.


특히 도청 정문은 고위 관리나 드나드는 특수 출입문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일반 도민이 이곳을 출입하려면 괜시리 눈치를 보거나 주눅이 들기 십상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과거 권위주위의 소산들이다. 그 권위의 틀이 깨지면서 수목 울창한 도심의 정원에서 뱃노래 가락과 시낭송이 섹스폰의 연주에 맞춰 울려퍼지고 무용, 연극 등 무대공연이 점심시간이나 주말의 오후를 이용하여 열린다는 것은 열린 도정을 지향하는 충북도의 시책을 도민의 눈과귀와 입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도청의 정원은 예로부터 「잉어배미」라 하여 명당으로 손꼽히는 곳이다.이러한 명당이 도청직원 몇몇의 쉼터로 머무른다면 그건 자원 낭비다. 공직자와 도민이 공간과 시간과 예술을 공유하는 실천적 의지는 말잔치로 끝나기 십상인 백가지 슬로건보다 백번 낫다.

원래 우리의 전통문화는 극장이라는 닫힌 장소보다 마당이라는 열린 장소를 선호했다. 달빛 별빛을 조명 삼아, 물소리 바람소리를 음향 삼아 열리던 것이 우리의 축제문화다. 기왕 열린 축제의 마당이니 이참에 거추장스런 도청의 담벽도 헐면 어떨까. 최소한 도민의 가슴에 심정적으로 남아있는 기관과의 담벽만이라도 이번 기회에 헐렸으면 한다.

도청 정원에서의 예술공연은 경직된 공직사회와 도민의 벽을 허는 발파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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