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을 위하여 내가 일할 때 나는 자유/ 땀 흘려 함께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고 김남주 시인의 시 「자유」의 일절이다. 그렇다. 김 시인의 말대로「자유」란 비로소 땀 흘려 있할때 얻어지는 소중한 산물이고 피 흘려 얻어진 고귀한 권리다.

지금부터 40년전, 이 땅의 젊은이들은 그 고귀한 자유를 위해 꽃다운청춘을 받쳤다. 자유당의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며, 이땅의 민주화를 염원하며 붉은 피를 거리에 쏟았다.

4.19는 분명 이 땅에 자유와 민주의 새싹을 심는 찬란한 봄이었고 또 총칼에 의해 새 새명의 움틈이 무자비하게 제거되는 잔인한 봄이었다. 그처럼 어렵사리 틔워낸 민주화의 싹은 군사 쿠테타에 의해 짧은 생명을 마감했지만 민주정신은 끝내 죽지않고 5.18에서 다시 부활의 노래를 불렀다.

누가 뭐래도 4.19는 이 땅의 자유를 위한 시금석이었고 이 땅의 민주화를 갈망한 역사의 분수령이었다. 4.19는 우리 근대사의 행간에 「민주」라는 두 단어를 명확히 새겨넣은 역사적 사건이었다.

부패와 독재의 사슬을 맨주먹으로 깨고 정의(正義)의 팻말을 우뚝 세운시민 혁명의 금자탑이었다.

그러나 무심한 세월속에 4.19는 점차 잊혀져 가고 있다. 선혈이 낭자했던 그날의 악몽과 환희위에 세월의 더께가 덕지 덕지 달라붙으며 4.19의 기억은 빛바랜 달력속으로 잦아든 것이다.

「학도는 용감하다/ 거룩한 피를 흘려...」 초등학교 조회시간에 부르던 「4.19」노래를 기억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어디 그뿐인가. 4.19직후 해세운 그 많은 기념비도 어디론가 자취를감췄다. 정치적 논리와 상황변화에 의해 수많은 젊은이의 피와 땀이 배인기념비가 슬며시 족적을 감춘 것이다.

우리의 의식속에서도, 기념비에서도 4.19의 숭고한 정신과 발자취는 찾아보기가 매우 힘들다. 연이어진 역사의 사건이 기념비위에 덧씌워진데다현대사회를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느덧 망각의 강을 건너온 것이다. 1960년 4월, 그해 함성이 아직도 귓전에 들리는듯 한데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4.19기념탑은 물론 그 흔한 기념비 하나 발견할 수 없다.

4.19기념행사도 어느새 흐지부지 되었다. 사회단체 일각에서만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뿐 지자체에서는 기념행사 대부분이 증발하고 말았다.설혹 일부에서 기념행사를 한다해도 요식행사로 끝나거나 행사의 규모가 보잘것 없다.

충절의 고장, 청주에서도 대구 마산과 더불어 의거의 횃불이 높았었건만역사의 가장자리에서 그 횃불의 흔적은 점차 희미해져 가고 있다. 새 천년의 원년에서 의거 40주년을 맞이했어도 그 함성소리는 세월을 비켜가고있다.

그 잊혀진 시공속에 4.19의 숭고한 정신을 다시 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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