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녕은 역시 충북이 낳은 세계의 신궁이었다.
지난 93년 결혼과 함께 활을 놓았던 김수녕이 6년만에 복귀해 자신의 4번째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건 것은 드라마틱한 한편의 인간승리에 다름 아니다.

20대 초반의 한창 나이에 스스로 세계 양궁여왕의 자리를 내놓은 것이나 오랜 공백을 뛰어 넘고 두아이의 엄마가 되어 현역에 복귀해 세계정상에 다시 우뚝 선 것은 개인의 영광을 넘어 올림픽사에 한획을 긋는 쾌거라 할수 있다.

아무리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다 한들 수년만에 활시위를 다시잡아 세계정상의 자리에 서기까지 그가 감내했을 고통이나 정신력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다.
잘알다시피 김수녕은 청주가 낳은 세계 양궁계의 여왕이다.

그는 청주 덕성초등학교 4학년이던 지난 81년 활시위를 잡은 이래 천부적인 재능을 보여 여고 1년때인 87년 처음으로 태극기를 달고 출전한 프랑스양궁선수권대회에서 2관왕이 돼 신데렐라로 떠 올랐다.

88년 서울 올림픽에서는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개인·단체전을 석권 우리나라 최초의 올림픽 2관왕의 영예를 안기도 했다.
이때부터 김수녕이라는 이름앞에는 신궁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고 이를 기념해 지은 김수녕양궁장은 지금도 후배양성의 요람이 되고 있다.

이후 89년 스위스 세계선수권대회와 91년 폴란드선수권대회에서 4관왕을 차지했고 잇따라 세계 신기록을 갈아 치우면서 명실상부한 세계양궁의 여왕으로 발돋음했다.
그러나 김수녕은 90년 북경아시안게임 개인전 동메달에 이어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도 개인 은메달에 그치자 한창 선수생활을 할수 있는 나이에 미련없이 결혼과 함께 양궁계를 떠났었다.

그런 그가 6년만인 지난해 우리나라가 프랑스 세계선수권대회 여자단체전 8강에서 탈락하자 양궁계의 요청을 받아들여 현역에 복귀했다.
김수녕은 단체전 금메달로 우리나라 하계올림픽 사상 최다관왕은 물론 동양에서도 유일한 여자선수가 됐지만 그 영광은 피나는 땀의 결실이었다.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는 것보다도 힘들어 지옥의 레이스라 불리는 대표선발전에서는 링거주사를 맞아가는 투혼을 발휘한 끝에 태극마크를 다시 달았다.

개인전에서 까마득한 후배 윤미진에게 패해 결승진출이 무산되자 눈물을 보인 그였지만 후배들을 토대거리며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따낸데서 보듯이 그는 진정한 승부사로 다시 우리곁으로 돌아온 것이다.
더구나 그가 단체전 우승후 어느대회보다 값진 메달이었다고 밝혔듯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3개나 따내고 결코 쉽지 않은 그 험한 길을 극복해 냈다는 점에서 더욱 값지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다음 올림픽에도 반드시 출전하겠다는 그의 의지에서 우리는 진정한 프로정신을 배워야 한다.
조금만 힘들어도 포기하고 반짝 스타가 판을 치는 세태속에서 젊은세대들에게 김수녕의 부활이 한여름 시원한 소나기와도 같은 청량제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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