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덕 로터리에서 장호원쪽으로 접어들어 3km쯤 가다보면 해발 1백m 정도의 구릉지대 끄트머리에 삼국시대의 자그마한 토성이 동네를 내려다 보고 있다.
 이 토성이 바로 충주시 신니면 견학리(見鶴里)에 있는 견학리 토성이다. 마을의 행정지명은 견학리이나 자연지명은 「잠미」라 부른다. 성을 「성재」라 하고 그 아래 동네를 「재밑」으로 부르다 「잔미」 「잠미」등으로 음운변화를 겪은 것인데 이러한 예는 보은 노고산성밑 잠미 마을에서도 발견된다.
 견학리 토성에도 예외없이 봄은 찾아온다. 달래, 냉이, 쑥부쟁이 등 봄나물이 얼은 땅의 껍질을 뚫고 고개를 내민다. 전쟁의 상흔은 온데 간데 없고 봄바람이 살랑거리며 성벽을 한바퀴 돈다.
 봄바람이 이곳서 오래 머물지 못하고 금세 빠져 나가는 것은 비단 변덕스런 기후탓 만은 아니다. 원래 네귀퉁이가 반듯한 토성이었으나 농지로 잠식되고 벽돌공장이 들어서는 통에 토성의 절반 가량이 없어졌다.
 서쪽 성벽은 이미 유실되었으며 바깥 성벽을 기준으로 해서 남벽 22m, 동벽 58m, 북벽 44m로 1백24m만 남아 있다.
 지난 91년에 이어 이번에 충북대박물관(책임조사원굛차용걸)에서 다시 발굴조사를 실시했는데 그 결과 판축(版築)토성의 한 전형을 보여줬다.
 기둥을 세우고 켜켜히 판축을 한 흔적이 시루떡처럼 드러났다. 회갈색, 적갈색, 황적갈색 등 층위를 이루는 판축의 색깔이 약간씩 다르다. 판축과 더불어 해자(垓子굛적병의 침투를 막기위해 성벽 밖으로 파놓은 연못) 성격을 띤 도랑과 기둥구멍, 그리고 배수로 석렬 등이 조사되었다.
 성내에서는 외날돌도끼, 무문토기 등이 수습된 것으로 보아 청동기시대 부터 거주지로 확인됐으며 성벽에서는 연질토기, 경질토기, 격자문(格子文)토기, 주름무늬 경질토기 등이 나왔다.
 이로보아 1차 판축은 삼국시기로 소급될 가능성이 있고 2차 수축은 통일신라 중기이후로 보아지나 고려시대 이후엔 폐성된 것으로 조사단은 판단하였다.
 이 작은 토성의 특징은 한강유역에 존재하는 유일한 방형(네모꼴)토성이라는 점과 더불어 내부구조가 중세 한국 성곽의 시원적 성격이 강하다는 점이다.
 즉 고대 말기의 성에서 중세의 성으로 전환하는 과정의 어떤 연결 고리로 해석되며 지역적으로는 충주지역이 국원소경(國原小京)에서 중원경(中原京)으로 바뀐 과정에서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시대적으로는 9세기를 전후한 호족의 발생과도 상당한 연관성이 있는듯 하다. 이처럼 중요한 토성이 문화재로 지정을 받지 못한채 방치되고 있어 아쉬움을 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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