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연 차 이야기 25. 다실의 정취

오후 산책을 나섰다. 우암산 자락 아래 자리한 수암골은 인도인지 차도인지 모를 정도로 번잡했다. 고즈넉한 이곳이 언제부터 이렇게 현란한 거리가 되었을까. 새벽 산책길에서 느꼈던 해묵은 집들의 온기는 사라지고 하마 같은 우람한 상가들이 툭툭 불어나 마치 터줏대감이라도 된 것처럼 눈 내리깔고 아래를 응시하고 있다.

새로운 문물을 탐험이라도 하듯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아직 시멘트 냄새도 가시지 않은 휑한 건물의 현수막이 눈에 띈다. 임대료를 따져보니 상가가 비어있는 이유를 대략 알 것 같기도 하다. 언덕배기 비탈진 좁은 땅도 마다않고 불안한 축대를 세워 올라간 고층들을 보니 현대인들의 빠듯한 삶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우암산의 정기를 한껏 품으며 고단한 삶을 위로받던 수동의 달동네. 기대했던 한옥마을의 고색창연함은 물거품이 된 것인가.

아담한 수암골은 우암산의 정취를 고스란히 담아낸 멋진 정원으로 충분한 곳이다. 한국의 전통정원으로 유명한 담양 소쇄원, 해남 부용동 정원, 영양 서석지 정원, 강진 다산초당, 논산 윤증고택, 봉화의 청암정에 비할까 만 청주시민들의 아늑한 산책지로 손색이 없는 곳이 아닐까. 과학과 산업으로 치닫는 기계적인 삶의 각박함을 풀어낼 수 있는 유일한 곳, 그것은 자연에서만 회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 유명하다는 카페를 찾아갔다. 3층이나 되는 건물 안에는 사람들로 와글거렸다. 대부분 젊은 사람들로 꽉 차있었지만 중후한 멋이 풍겨나는 부부의 모습이 카페의 분위기를 한층 돋보이게 했다. 커피와 홍차 향기 그리고 달콤한 케이크가 어우러져 모던한 신세기의 분위기를 절묘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왕왕대는 소음에 귀가 먹먹하다. 이 분위기에 심오한 차 맛을 느낀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조용한 찻집을 찾아다니다 수동의 달동네로 들어섰다. 미로 같은 좁은 골목길엔 연탄재가 인테리어 인양 가지런히 놓여있고 낮은 담벼락의 정겨운 그림은 초행의 낯섦을 어색하게 했다. 납작한 집의 나무 대문 안으로 자그마한 차실의 풍경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칠이 벗겨진 나무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연탄난로 위의 투박한 주전자. 아까 보았던 통유리의 세련됨은 없었지만 고향집에 온 것처럼 편안했다. 몇 백 미터의 거리에서 격세지감을 맛보았다.

정지연 국제차예절교육원장·다담선 대표
정지연 국제차예절교육원장·다담선 대표

좋은 분위기의 차 자리는 어떤 것일까. 나라마다 차실의 분위기는 다르지만 그 고유함은 깊이 뿌리박혀 있다. 혼자 마시기를 즐기는 차의 경지를 신(神)이라 여길 정도로 차 자리는 아취를 중요시했다. 하여, 옛 선비들은 정원 안으로 자연의 경이로움을 끌어들여 초월적인 삶을 추구했고 자신을 둘러싼 자연경관에 감응하여 예술과 문학을 창조해나갔던 것이다. 특히 소나무, 대나무, 매화, 난, 국화를 심어 그 의미를 되새기며 부조리한 사회를 질타하고 꿋꿋한 선비의 의지를 작은 다실로써 영위해나갔다.

내려오는 길 역시 차와 사람이 뒤엉켜 혼비 하다. 맑은 우암산의 정기가 괴물들의 물욕으로 훼손되고 고아한 수암골의 정취가 뿌연 잿빛으로 젖어드니 안타까운 일이다. 무엇보다 자연을 지키는 일이 사람을 아끼는 일이 아닌가. 더 이상의 개발은 필요하지 않다. 수암골의 진귀한 가치를 소중히 여겨 한국적인 정취로 남아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 작은 마을이 외국인의 랜드마크로 거듭난다고 어느 누가 탓하겠는가. / 국제차예절교육원장·다담선 대표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