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행간엔 진달래 꽃으로 수놓은 연인들의 애닲은 연사(戀事)가 빼곡하다. 명종 3년(1548), 단양 군수를 지낸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과 명기 두향(杜香)과의 사랑도 빼놓을 수 없는 러브 스토리다.
 기문총화(奇聞叢話)와 호서읍지에는 단양기생, 두향(또는 杜陽)에 관한 기사가 몇 줄 보인다. 중종때 단양에서 태어난 두향은 성이 안씨다. 본래 그는 기녀가 아니었으나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어느 퇴기(退妓)의 수양 딸이 되었다.

 시화와 거문고에 능한 두향은 대학자 퇴계선생이 단양군수로 부임해 오자 선생을 사모하게 되었다. 13세에 기적(妓籍)에 오른 두향은 출중한 용모와 거문고 솜씨로 퇴계선생을 사로잡은 것이다.
 정비석의 [명기열전]에 의하면 산세가 빼어난 옥순봉을 청풍에서 단양으로 양보받아 오는데 두향이가 한몫을 했다고 한다. 두향은 이를 퇴계선생에게 간청했고 퇴계선생이 청풍군수 이지번을 설득한 끝에 옥순봉을 양보받아 단양팔경의 구색을 갖추게 했다는 이야기다.

 그후 옥순봉 일대는 두 사람, 러브스토리의 무대가 된다. 두 사람의 사랑이 4월 진달래 꽃빛으로 물들어 갈때 퇴계의 집안 형이 충청감사로 부임하게 된다. 조선시대에도 집안 사람이 자치단체장으로 함께 근무하는 것을 막는 상피(相避) 원칙이 있었으니 부득이 퇴계 선생은 경북 풍기 군수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꽃에 해가 지고 동녘에 달이 뜨니/ 꽃과 달이 어울려 시름은 한이 없다/ 달은 만월인채 지지 않는다면/ 술 못 마실 걱정은 없으련만] 두향과 이별을 아쉬워한 퇴계는 시 한 수를 읊었다.

 퇴계와 이별한 두향은 강선대(降仙臺)가 눈 아래 보이는 적성산 기슭에 초막을 짓고 숨어 살며 그리움을 홀로 달랬다. 퇴계의 건강이 안 좋다는 소식을 들은 두향은 칠성당을 지어놓고 님의 건강 회복을 빌었다. 1570년 12월 8일, 두향의 기원에도 불구하고 퇴계선생은 세상을 떴다.
 그리움을 이기지 못한 두향은 분신처럼 아끼던 거문고를 태우고 26세의 꽃다운 나이에 [유해를 강선대옆에 묻어 달라]는 유서 한통을 남긴채 강선대에서 몸을 날려 생을 마감하였으니 참으로 목숨보다 중한 사랑이다.

 [외로운 무덤 길가에 있어/ 거친 모래에 이름이 붉게 비치네/ 두향의 이름이 사라질 때면 강선대의 바위도 없어지리라] 영조때의 문인, 월암(月岩) 이광려(李光呂)가 두향을 위해 지은 시다. 월암의 싯귀대로 충주호 담수에 따라 강선대는 묻혔으나 두향의 이름은 청사(靑史)에 빛나고 있다. 두향의 정절과 일편단심을 기리는 단양팔경축제가 진달래 필 무렵에 단양군 단성면 일대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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