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시론] 한병선 교육평론가·문학박사

기사와 직접 관련 없습니다. / 클립아트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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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어린이 집에서 벌어진 일이다. 속된 말로 교사의 폭력에 아이가 단 한방에 날아갔다. 이런 모습을 목격한 아이들은 얼어붙고 말았다.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이가 토한 음식을 강제로 다시 먹였다. 이뿐만이 아니다. 아이를 질질 끌고 다니는 모습은 말 그대로 목불인견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아이를 사랑해서 그랬다는 교사의 항변이다. 이건 사랑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모독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어딘 선가 많이 보고 들은 데자뷔였다. 그랬다. 지금까지 이런 체벌문제가 터질 때마다 어김없이 나왔던 말은 "교육차원에서" 혹은 "아이를 사랑해서"라는 변명이었다. 훈육이라는 교육적 차원과 '사랑의 매'라는 모순된 형용은 늘 그렇게 이어져 오지 않았던가.

그래도 이 정도까지만 사랑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아이를 더욱 사랑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과거에 비해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 교사폭력은 많이 줄었다. 하지만 여전히 어린이집 보육교사들의 폭력은 줄지 않고 있다. 초·중·등 교사들은 공교육이라는 제도적인 틀 안에서 비판과 감시를 받아왔지만 보육교사들은 상대적으로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2017년 보건복지부 국정감사 자료에 의하면 전체 4만1천221개의 어린이 집 중 3만2천918개소만 평가인증에 참여했을 뿐 20.1%가 관리권 밖에 있었다. 보이지 않는 폭력이 더 많을 수 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교사의 핵심적인 자질은 '자기 통제력'이다. 어린 아이들과 정서적 교류를 해야 하는 보육교사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 사건의 경우도 교사가 분노조절을 하지 못해 발생한 일이다. '교육적 식견'의 결여도 작용을 했다. 교육과 폭력을 구분할 줄 아는 교육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만 있었어도 이런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자기통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자기통제력 없이 교사의 직무를 수행하기 어렵다. 문제는 또 있다. 늘 그렇듯이, 교사의 체벌과 폭력문제가 상시적으로 발생하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해결의 의지는 사라져버렸다. 체벌문제를 보는 우리의 시각도 다층(多層)적이다. 교사들의 체벌을 용인하는 분위기도 여전하다.

심지어 체벌을 주장하는 시각들도 존재한다. 체벌과 폭력을 구별해야 한다는 논리다. 체벌은 교육적인 동기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폭력은 교육적인 동기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교육현장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들이 교육적이지 않은 것이 없는 이상, 체벌은 폭력이 아니라는 결론이다. 그렇다면 위의 사례도 교육적인 활동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한병선 교육평론가·문학박사
한병선 교육평론가·문학박사

이런 인식은 폭력을 교육이라는 수사로 무력화시키는 교육적 미화에 불과하다. 사실 이번의 경우, 피해자가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체벌 문제를 긍정적으로 볼 수 없는 환경이 조성되었지만 늘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동안 교사들의 체벌이나, 폭력문제가 터지면 이를 용인하는 긍정론이 대세를 이루었다는 점에서다. 이 뿐인가. 교직사회는 '열정이 없으면 체벌도 하지 않는다'는 반교육적 모습을 앞장서 연출하곤 했다. 폭력을 사랑으로 호도하기도 한다. 바로 이런 점이 교육현장의 체벌과 교사폭력을 해결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체벌이라 부르든, 폭력이라 부르든 이 문제의 해결 없이는 걱정 없이 아이들을 맡기기는 어렵다.

많은 사람들은 일상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는 것이 보통이다. 더 나아가 일상성의 세계를 고착화된 사실로 인식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누구도 그것에 대해 묻거나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앞서 지적했듯이 이런 일상성의 결과가 '사랑의 매'라는 모순된 형용을 만들어냈다. 그 일상적인 것들에 대해 의문을 갖는 순간 우리 교육의 모습은 달라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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