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정상회담]
이산가족 오광수씨 인터뷰

남북정상회담을 하루 앞 둔 26일 이산가족인 오광수씨가 평화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남북관계가 빠른 시일 내에 개선돼 교류가 재개되면서 헤어졌던 친척들을 찾고 싶다는 소망을 밝히고 있다. / 김용수
남북정상회담을 하루 앞 둔 26일 이산가족인 오광수씨가 평화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남북관계가 빠른 시일 내에 개선돼 교류가 재개되면서 헤어졌던 친척들을 찾고 싶다는 소망을 밝히고 있다. / 김용수

[중부매일 이완종 기자] "살아 생전 헤어진 가족들을 그리워 하셨던 아버지께서 이 소식을 들으셨더라면 기뻐하셨을텐데 아쉽습니다."
 
오광수(80·청주시 상당구 문의면)씨는 11년만의 남·북정상회담 소식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 평생 북에 남겨진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상봉의 꿈을 꾸셨던 아버지 故오호법씨는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오광수씨는 북에 남겨진 가족들을 그리워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한평생 지켜봤다.

아버지는 마지막 임종 직전까지 '누이와 누이동생을 살아생전 다시 보지 못해 아쉽다'며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할 만큼 애틋함이 남다른 사람이었다. 오 씨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외로운 사람'이었다. 혈육과 동떨어져 혈혈단신으로 남쪽에서 터전을 잡았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선 평생 북쪽에 남겨진 누이와 누이동생을 그리워 하셨어요. 평소 가부장적이고 과묵한 아버지였지만 가족들의 이야기를 할때마다 눈시울을 붉히셨죠. 전쟁통에 쫓기듯 남쪽으로 내려와 사진조차 없으셨어요. 유일하게 누이동생의 물건이었던 사기그릇을 그렇게 애지중지 하셨습니다."
 
그러나 헤어진 가족 찾기는 항상 뒷전이었다. 남쪽에서의 삶은 그리 넉넉지 못했으며 책임져야할 가족들도 있었다.
 
"아버지께선 그렇게 가족들을 그리워하셨지만 따로 찾진 않으셨습니다. 전쟁통에 쫓기듯 지금의 대전으로 내려와 터전을 잡고 양말을 군납하는 등의 일을하며 근근이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셨습니다. 항상 가장으로서 무게를 등에 짊어지고 살아오셨기 때문에 헤어진 가족들의 그리움만 마음속으로 크셨던 것 같아요." 
 
오광수씨는 최근 남북관계가 회복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더 늦기전에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지키고 싶다고 설명했다. 아버지가 그토록 소망하셨던 북쪽의 친척들을 찾겠다는 것이다.
 
"사실 벌써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20여년이 흘렀습니다. 이제는 아버지의 얼굴도 가물가물할 정도입니다. 제 나이도 올해 80입니다. 그동안 찾아볼 여력도 없었고 형편도 아니었기 때문에 현재 북쪽의 친인척들의 생사조차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못다 이룬 꿈을 더 늦기전에 노력해 볼 생각입니다. 앞으로 남과 북의 관계가 개선된다면 시간은 걸리겠지만 더 좋은 날이 오겠죠."
 
한편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2000년 8월 15일부터 2015년 10월 26일까지 대면상봉 20차례, 화상상봉이 7차례 성사됐다. 총 27차례에 걸친 상봉행사로  2만 3천여 명이 꿈에 그리던 가족과 재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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