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정치 경제 교류의 붐을 타고 사회, 문화, 체육 등 여러 분야가 철조망을 넘나들고 있다. 반세기 동안 굳게 닫혀 있던 분단의 벽도 시대의 요청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정부와 더불어 각 지자체가 경쟁적으로 남북 교류를 모색해 오고 있는 터이므로 문화 분야의 교류 요구는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 민족의 동질성 회복을 위해선 오히려 문화분야가 기수가 돼야 마땅하다.

 학술, 문화 중에서도 고고학 분야의 교류는 빼놓을 수 없는 과제이다. 왜냐하면 고고학 분야는 대부분 국가가 성립되기 전의 단계여서 이념상의 문제점이 별로 없다.
 국가도 없고 이념도 없고 비자발급도 없이 자유롭게 소만국경과 한반도를 넘나 들던 자유의 선사인이었기에 이 분야의 남북 교류는 어떤 고정관념이나 틀로 부터 상당히 자유스러워 진다.

 남북 고고학 교류의 시금석이 충북에서 마련됐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지난 1989년, 북경에서는 「북경인 발굴 60주년 기념 국제고고학 학술대회」가 열렸었는데 이때 충북대 이융조교수(한국 구석기학회장)가 참석했다.
 그런데 이 교수는 우연히도 김용남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 연구소장 등 북한 학자들과 조우한 것이다. 이 교수는 이 자리에서 4만년전의 인골인 「청원 두루봉 흥수아이」두개골과 단양 수양개 유적 출토 석기 복제품을 몇점 북한학자에게 건넸고 북한 학자들도 「조선인의 기원연구 책자」를 건네왔다.

 양측은 그후 다시 만날 것을 언약했지만 아직 성사되지 않고 있다. 그 언약이 밀레니엄을 건너뛰었으니가히 천년의 약속이다.
 일찌기 이 교수는 「북한의 구석기 시대 연구」라는 논문에서 『민족문화의 동질성 회복을 위해선 고고학 분야의 남북한 학술교류가 절실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특히 구석기 분야에 있어서는 남북한의 유적이 많은 친연성이 있는데도 불구, 남북 분단으로 총체적인 연구에 어려움이 크다는 지적이다.

 예를 들면 2만년을 전후한 후기 구석기의 경우 단양 수양개, 공주 석장리와 평양 만달리가 상당히 닮은 꼴이나 양측의 관련 학자가 한 자리서 비교 연구한 적이 없으며 유물 또한 교환된 적이 없다.
 한민족의 이동에 비밀의 열쇠격인 흑요석은 평양 만달리, 단양 수양개, 전남 화순 대전 등지에서 발견되었으나 이에대한 이동의 라인을 정확히 풀지 못하는 상태다.
 흑요석은 화산활동중 생성되는 까만 돌로 석질이 매우 단단하여 주로 화살촉 등을 만들었다. 선사인들은 이동시 보물 1호처럼 이를 꼭 지참하였다. 그 흔적들이 화산활동이 없던 남북한 여러 유적에서 나타난다.
 또한 청원 두루봉 동굴과 북한의 검은 모루는 똑같이 뼈화석의 보고(寶庫)라는 공통점이 있음에도 한 자리에서 연구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이런 점들을 종합해 볼때 남북한 고고학 교류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히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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