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진단] 최동일 부국장겸 정치행정부장

'군사분계선 앞에 선 북한군 경비병' / 뉴시스

6·25전쟁 발발 1년을 넘기며 남북이 치열한 공방을 벌이던 1951년 9월, 두달전부터 휴전회담을 시작한 양측은 첫 회담장소였던 개성에서 경기도 파주시의 한 시골마을 가게 앞 콩밭으로 회담 장소를 옮긴다. 이때부터 2년여 가까이 회담을 이어가던 북한·중국의 공산측과 국제연합(UN)군은 1953년 7월27일 마침내 한국휴전협정을 조인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당초 '널문리'였던 이곳 지명이 중국측의 한자 표기에 따라 판문점(板門店)으로 고쳐져 사용되면서 현재의 지명으로 굳어졌다. 석달뒤 양측은 원만한 회담운영을 위해 회담장소를 중심으로 군사분계선상에 동서 800m, 남북 400m 장방형의 경계를 정하면서 지금의 판문점이 만들어지게 됐다.

휴전으로 군사분계선(휴전선)이 그려지고 남북 양쪽으로 2㎞의 비무장지대(DMZ)가 만들어졌지만 판문점은 UN과 북한측이 공존하는 '공동경비구역(JSA)'으로 정해졌다. 이 무렵 이곳에서 포로교환이 이뤄지면서 분단의 비극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생겨난다. 당시 전쟁포로들은 이 다리 위에서 남과 북 중 어느 한 곳을 고르게 되는 데,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의 장소가 되면서 원래 '널문다리'였던 것이 '돌아오지 않는 다리'로 바뀐 것이다. 이후에도 판문점은 남북간 긴장과 대치상황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현장이면서도, 남과 북을 연결하는 창구로도 주목을 받게 된다. 특히 휴전이후 60여년이 넘는 세월동안 숱한 남북회담 장소로 이용되면서 전세계적인 분단의 상징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처럼 판문점이 분단의 상징이 되다보니 분단을 소재로 한 영화의 배경이 되기도 했는데 가장 유명한 영화로는 지난 2000년 개봉된 '공동경비구역 JSA'를 꼽을 수 있다. 판문점내에서 벌어진 남북 군인들의 총격사건을 해외입양 한국인인 중립국 수사관이 추리하는 형식으로 풀어낸 이 영화는 체제나 이념이 아닌 개개인의 관계를 통해 분단의 아픔을 그려낸 수작(秀作)으로 평가되며 흥행에서도 성공을 거뒀다. 영화의 근간이 되는 총격사건의 전말은 우연찮게 위험에 처한 남한 병사를 북한군이 구해주면서 교류가 시작되고 우정이 쌓여 인간적으로 돈독해지지만 어느날 밤 불청객의 방문으로 인해 서로에게 총질을 하는 파국에 이르게 된다.
 

최동일 부국장겸 정치부장
최동일 부국장겸 정치부장

27일인 오늘 이곳 판문점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열린다. 세번째 이뤄지는 정상회담이지만 앞서의 회담과는 달리 '북한 핵무기'이라는 현실적 숙제를 풀어야 하는 특별한 만남이다. 더구나 한달여뒤에 열릴 북미정상회담까지 감안한다면 한반도의 비핵화를 넘어 '완전한 평화정착'이 싹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게 한다. 현재 거론되고 있는 '종전선언'도 중요하지만 남북이 하나가 되는 만남의 물꼬가 되고, 우리가 한민족임을 되새기게 하는 전면적인 교류와 화합의 시발점이 되는 그런 자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총격전이 일어난 것은 느닷없는 침입자라는 돌발상황속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가 위기를 넘기기에는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정한 신뢰는 어려울때 빛을 발하고 어려울때 쌓인 신뢰는 그만큼 값지다. 한반도 평화정착을 긴 안목과 긴 호흡으로 볼때 언제 어느때 '느닷없는 침입자'라는 위기가 발생할 지 모른다. 하지만 어려울때 쌓기 시작한 신뢰라면 영화속과 같은 비극으로 결말을 맺지는 않을 터이다. 'JSA'의 속편이랄 수 있는 '정상회담구역 판문점'은 해피엔딩으로 끝나길 빌고 또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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