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늘게 이어지던 봄비가 뚝 끊기고 다시 햇빛이 고개를 내민다. 여늬때라면 청명한 날을 마다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지만 지독한 봄가뭄 속에 겨우 목만 축이게 하니 감질이 날만하다.
 「오네 오네 비가 오네/ 우룩 주룩 비가 오네/ 아침 비는 햇님 눈물 저녁 비는 달님 눈물/ 밤에 밤에 오는 비는 청룡 황룡 눈물인가」
 충주지방에 전해내려오는 민요다. 비에 대한 원망인지 찬사인지 구별할 수는 없어도 농사를 지으며 비와 함께 생활해온 농민의 마음을 충분히 읽어내릴 수 있는 대목이다.
 봄가뭄이 심각한 요즘이라면 찔끔거리는 5월 비는 햇님, 달님의 눈물이라기 보다 차라리 농민의 눈물인듯 싶다.
 예로부터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祈雨祭)는 역사속에서 무수히 등장한다. 세조 1년 7월, 충청도 관찰사 박팽년이 임금에 아뢰기를 『이제 농사일이 많은 시기인데 수십 일 동안 비가 오지 않으니 향(香)과 축(祝)을 내려서 명산(名山) 대천(大川)에 기도하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조 3년 5월에 또다른 충청도 관찰사가 아뢰기를 『비 내리는 시기가 어긋나서 지난 4월5일, 10일, 27일에 잠시 비가 오고 5월8일, 9일에 비가 뿌린후에는 지금까지 비가 오지 않으니 기우(祈雨)하게 하소서』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아부성 기우제 관련 상소도 있었다. 성종 18년 5월, 충청도 관찰사 김여석(金礪石)은 『도내에 가뭄이 심하지 않은데 급하게 기우제를 행하는 것은 적당치 않습니다』라고 간언하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가물지 않는데 비오기를 비는 것은 하늘을 속이는 것이다』라며 이를 정지했다.
 여기에 대해 사신(史臣)은 『김여석은 임금이 가뭄을 근심하는 것을 헤아려 알고 아첨하는 말을 올려서 근심을 풀게 한 것이다』라고 논평했다. (조선왕조실록)
 나라에 가뭄이 들면 임금은 이를 「부덕의 소치」로 자책했다. 몸을 정결히 하고 하늘에 제사하였으며 식음을 폐하고 거처를 초가로 옮겼다.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모화관, 경회루, 춘당대, 선농단, 한강변에서 기우제를 지낸 기록이 있다. 민간에서는 명산, 또는 큰 내(川)에서 기우제를 지냈으며 곳에 따라 우물을 선택하기도 했다.
 청원 문의 양성산성내에는 둥근 연못이 있는데 가뭄이 들면 동네 사람들이 기우제를 이곳서 지냈다. 마치 샘물이 솟듯 비가 오길 기대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한 것이다. 기우제에는 단체장이나 웃 어른이 헌관이 되었으나 지방에 따라선 무녀(巫女)가 등장하기도 했다.
 어느 지방에서는 역설적인 기우제가 있었다. 한 밤중 동네 여인들이 산 위에 올라 일시에 소변을 보면천지가 노하여 비를 내리게 했다는 이야기다.
 가뭄이 계속되자 전국 곳곳서 기우제가 이어지고 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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