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변광섭 컬쳐디자이너·에세이스트

이어령 박사 / 뉴시스
이어령 박사 / 뉴시스

"그것은 지도에도 없는 시골길이었다. 국도에서 조금만 들어가면 한국의 어느 시골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길이었다. 황토 흙과 자갈과 그리고 이따금 하얀 질경이꽃이 피어 있었다.(…) 나의 조국은, 그리고 그 고향은 한결같이 평범하고 좁고 쓸쓸하고 가난했다. 많은 해를 망각의 여백 속에서 그냥 묻어두었던 풍경들이다.(…) 나는 한국인을 보았다. 천 년을 그렇게 살아온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뒷모습을 만난 것이다. 쫓기는 자의 뒷모습을…."

새벽에 이어령의 명작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를 읽은 뒤 서울길을 나섰다. 차창 밖의 햇살은 눈부셨다. 난분분 난분분 꽃잎이 흩날리니 외롭고 가난했던 내 마음이 연분홍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산과 들과 시냇가에는 여린 새순이 앞다퉈 솟아오르고 있었다. 아, 어린 고양이 같은 봄날이여, 피어나는 생명이여, 가슴 설레는 사랑이여~. 이렇게 봄날의 풍경을 가슴에 담고 크리에이터 이어령 선생님을 만났다.

오늘은 두 손이 무거웠다. 벌랏마을에서 닥나무 한지를 만드는 이종국 작가가 두릅, 미나리, 냉이 등의 봄나물을 챙겨주었다. ㈜본정의 이종태 사장은 옹기와 백자 항아리에 담긴 초콜릿을 바리바리 싸 주었다. 부디 건강하셔야 한다며, 더 좋은 글 쓰고 더 좋은 문화운동을 펼쳐서 이 땅이 문화로 행복하면 좋겠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선물을 받은 당신께서는 미안함과 고마움이 가득했다. "아프지 말아야지. 청주사람들은 언제나 인정 많고 따뜻하며, 지혜롭고 열정까지 있으니 그들의 마음에 꽃이 되어야지. 가슴 뛰는 일, 이 땅의 보석 같은 일을 해야지…." 이렇게 당신은 말문을 열었다.

이 날의 화두는 컨버전스(Convergence)였다. 이종국 작가의 자연성 가득한 예술활동이 이 시대의 지향점임을 역설했다. 최고의 예술은 자연이다. 인간의 예술행위는 자연을 닮아가기 위한 노력인데 이 작가가 좋은 사례다. 여기에 도시의 어린이들과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자연학교까지 열고 있다. 녹조를 활용한 아트작품을 만들고 자연과 미술과 공예의 조화를 통한 새로운 가치 창조에 힘쓰고 있으니 얼마나 아름다운 실천인가. 자연성을 뛰어넘는 디자인과 스토리, 그리고 창조적 콘텐츠를 만들어 주면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본정의 옹기초콜릿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당신께서는 한국의 장독대 문화야말로 세계 최고의 바이오과학을 이끈 원천이라고 웅변하지 않았던가. 일반 자기나 공업용 그릇과 달리 옹기는 미세한 입자 사이로 날숨과 들숨이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발효음식을 만들어 왔다. 김치, 간장, 된장, 고추장 등 장류문화는 옹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며 조상들의 지혜가 담긴 그릇이다. 옹기는 배가 불룩하다. 우리 조상들은 그곳에 시간을 담고 자연을 담았다. 정을 담고 사랑을 담았으며 애틋한 삶을 담았다. 옹기들이 모여있는 장독대 주변을 어슬렁거리면 장 익는 냄새가 구순하다. 봉선화 피고 고추잠자리 한유롭다. 어머니의 눈물겨운 이야기와 곡진한 마음이 담겨 있고, 한 가정의 평화와 소망이 담긴 곳이다.

변광섭 에세이스트
변광섭 에세이스트

이처럼 한국의 오랜 신화와 지혜와 정신이 깃든 옹기에 유럽의 초콜릿을 담았다. 당신께서는 "진정한 한국정신의 발현"이라고 했다. "한국의 옹기문화가 유럽의 음식을 품은 것"이라고 했다. 그동안 서구문명이 한국인의 삶과 정신을 혼미하게 했는데, 이제는 한국의 문화가 서구의 문명을 품고 담으며 그들의 마음까지 깃들게 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초콜릿을 팔지 않는다. 우리의 문화를 팔 뿐이다"라고 말한 ㈜본정 이종태 사장의 정신과 우리문화의 세계화를 이끈 이어령 선생님의 철학은 다르지 않다.

오늘 밤, 많은 별들이 한 곳을 향해 쏟아졌다. 그 별빛을 따라가면 아름다운 일, 가슴에 별이 되는 일들이 가득할 것이다. 갈 길 잃은 탕자에게 별이 빛나는 하늘은 희망이다. 새로운 가능성의 확장이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