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세이] 이영희 수필가

/ 클립아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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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낯설지 않은 불청객이 기습적으로 쳐들어 왔다. 숨어 있다가 봄바람에 편승했는지 성큼 들어선 것이다.

새로운 전자제품의 사용설명서를 무시하고 그냥 쓰다가 고장이 나면 사용자 잘못이라고 하는데, 그런 맥락으로 치면 부주의한 내 잘못이다. 빨리 가버렸으면 하고 닦달을 해도 꿈쩍도 하지 않으니 내 안에 유숙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선 급한 대로 녀석을 밀어내려 약을 찾아서 뿌려 본다. 소화기를 분사하듯 사흘이나 떨쳐내려 애를 썼지만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 참에 갑자기 가야 할 모임이 생겨 사정이 생겨 곤란하다고 했으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그가 사라지는 것이 제일 좋지만 스토커같이 천연덕스럽게 따라붙으니 동행할 수밖에 방법이 없다. 하필이면 눈에 착 달라붙어 탁한 색의 안경을 써 보지만 결혼식같이 축하할 일에는 발걸음을 자제해야 할 것 같다.

아주 무시해버리면 되는데 그게 되지 않아 안절부절못하자 남의 속도 모르고 나이 먹어도 여자는 여전히 여자라고 놀린다. 불편한 외출에서 돌아와서도 그는 남의 입장은 전혀 배려하지 않고 제 집같이 태평하게 자리를 깔고 누워버린다.

주객이 전도된 것 같다고 했더니 녀석을 자주 접했다는 지인이 말한다. 처음부터 근접도 못하게 하는 게 최선이고, 침입한 뒤엔 누구도 그를 금방 쫓아낼 수는 없으니 푹 쉬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차선이라고. 

하긴 행복의 첫 번째 요소도 나를 남과 비교하지 않는 무관심이라고 하지 않던가.

시간, 말, 기회는 한번 놓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데, 그런 불한당에게 시간을 무한정으로 주어야 한다니 안타깝고 무대책이나 다름이 없지만 어쩔 수가 없다. 그 말을 심드렁하게 되뇌면서 습관적으로 책을 펼치다가 얼른 놓아버린다. 그는 무지막지한 반면 글자를 좋아해서 꽃방석을 깔아주는 격이라고 한 말이 떠올라서다. 활자 중독증인 사람이 책을 멀리하고 시간을 보내려니, 눈에 더 해롭다는 스마트폰으로 손이 자꾸 가서 소탐대실하는 격이 되었다. 평소에 에너자이저란 별명을 듣는데 억지춘향을 하려니 고역이고 따분하지만 어쩌겠는가.

녀석이 물처럼 흘러가버렸으면 하는 마음으로 눈을 감고 빗방울 전주곡을 들어본다. 빗속에 갇힌 고립무원의 폭풍우를 견뎌내고 희망을 찾은 듯 안온한 빗소리로 마음의 평화를 주는 곡이다.

그 속에 투병 중인 친구의 얼굴이 떠오른다.

문병을 갔을 때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서도 가족들이 모든 것을 본인한테 맞추어 생활하니, 자기만큼 복 많은 사람이 없다고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우리를 걱정하며,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니 스트레스받지 말라던 그녀가 대견하고 안쓰러워 빠른 쾌유를 비는 기도가 절로 나왔다.

기도 밖에 할 수없는 우리들의 마음은 애잔하고 안타까웠는데, 별것도 아닌 한시적인 불한당한테 휘둘린 내가 얼마나 한심하던지. 내 고뿔이 남의 염병보다 더 하다는 속담이 있지만 이 무슨 엄살인가 싶어 미안해진다. 

살면서 우리는 수시로 불청객의 침입을 받는다. 한창때는 푹 자고 나면 피곤함이 씻은 듯 사라져 녀석을 볼 수 없었는데, 세월의 더께는 면역력을 떨어뜨려 본의 아니게 그들을 가까이하게 된다. 피곤하다 싶으면 이번같이 눈에 달라붙어 실핏줄을 터지게 하거나, 혓바늘, 뾰루지, 감기 등의 모양으로 친한 척 달라붙는다. 이번 봄에는 미세먼지까지 가세하여 숫자를 늘려 주고 있으니...

일과 휴식의 균형을 잘 유지하면서 피곤하다 싶으면 잠깐의 오수라도 즐기는 게 현명하지 싶다. 그래서 건강 조바심증 환자가 늘어난다고 하지만, 좋은 생활습관으로 동행하는 이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해야겠다.

헤르만 헤세가 '자신에 이르는 길이 예술이고 예술은 모두 대가의 산물이다.'라고 했는데 그 녀석 덕분에 부족한 글이나마 한편 건졌으니 삶에 정답이 없다는 것이 정답인 것 같다. 

벌겋게 성난 소 눈같이 만들었던 불청객은 사람의 진을 다 빼놓고 20여 일만에 사라졌다. 가는 듯 내 안에 도사리고 있을 그가 다시 나타나지 않게 섭생하라는 경고를 보내고.
 

# 약력
 
▶1998년 '한맥문학' 신인상
▶충북수필문학회, 한맥문학회 회원, 청풍문학회 회장 역임
▶충북수필문학상 수상
▶수필집 '칡꽃 향기'
▶중부매일 '수필 & 삶' 집필 중 
▶충청북도교육청 방과후학교 지원단장 역임
▶현재 청주시 1인 1책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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