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모임득 수필가

클립아트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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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휠체어에 태우고 이제는 남의 집이 된 문밖에서 쭈뼛거린다. 몇 달 만에 찾아 온 고향집이다. 마당에 심은 푸성귀와 양철 지붕 위로 삐죽 올라온 감나무, 한곳에 머물러 있는 절구통도 그대로다. 어제와 그제의 햇살이 다르고, 오늘과 어제의 햇살이 다르다. 여태 이 집에서의 시간은 저마다 달랐을 텐데, 다른 사람에게 집을 팔고 처음 바라본 집은 다른 시간과 햇살 속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어린 시절의 추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이 집만큼은 그 시간 속에 머물러 있기를 소망해서 일터이다.

시집오는 날, 문틈으로 아버지를 처음 보았다는 어머니. 어머니가 어렸을 적 살았던 집은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집에 가고 싶다'고 노래 부르는 집은 60여 년 동안 남편과 자식들과 부대끼며 살아온 모과나무집이다.

모과나무가 있는 대지랭이 집에서 넘어지셨다. 뼈가 부러진 건 아닌데 못 걸으셔서 입원한 뒤로, 정말 며칠만 병원 신세 지면 갈 줄 알았던 집으로 육 년 째 못가고 있다. 가지를 치듯 해가 갈수록 늘어나는 병명에 이제 지칠 듯도 한데, 나 집에 갈래……. 어머니의 귀거래사는 날마다 현재진행형이다. 정신이 현재에 있을 때는 자식들 걱정할까 봐 아무 말씀을 안 해도 과거 속의 당신 세상에 가 있을 때는 집에 데려다 달라며 보채신다.

삶의 편린들을 잊은 상태인데도 왜 집에 간다고 늘 말씀하실까. 신산한 기억일지라도 고향이란 말을 들으면 마음이 아늑해져서 일까.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회귀본능이 아닌가 싶다. 자신이 태어나서 자란 고향을 그리워하고 돌아가고자 하는 회귀본능이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다가 무의식속에 나오는 것이 아닐까.

늙는다는 것은 슬프고 서러운 일이다. 어머니에게도 소녀 시절이 있었고, 자식들 먹여 살리려 억척같이 살았을 젊은 날이 분명 있을 텐데, 8인 병실에서 집에 간다고 보채는 모습이 안타깝고 서글프다. 원하든 원치 않든 어머니의 시간은 조금씩 무너지고 있고 그것을 지켜보는 가족 또한 무기력하게 무너지고 있다. 가끔 요양병원을 찾아가면 병원 밥이 나올 때 같이 먹자는 것과, 맛있는 거 사드시라고 서랍에 넣어둔 몇 푼 돈으로 음식을 시켜 자식 입으로 들어가게 해주는 것이 당신이 해줄 수 있는 사랑이다.

모임득 수필가
모임득 수필가

다리를 시작으로 위로 서서히 굳어가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자식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것과 외면하고픈 것이 공존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만들어내는 시간 속에서 외면하고 싶어 하는 것들이 점점 자기 합리화를 시킨다. 어쩌면 그래야 부모를 요양병원에 맡겨둔 자식들이 마음의 가책 없이 살 수 있는 방편일 수도 있다.

어느 날은 어머니가 '내가 너희 여섯을 키웠는데, 너희는 여섯이 나 하나 간수 못 해 요양병원에 데려다 놓았냐'고 말씀하셨단 소리를 듣고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한 적이 있다. 무심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나 역시 언제인가 늙고 병들어 어머니처럼 요양병원에서 자식에게 부담을 줄 수도 있는데도 나 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일처럼 느낀다. 오늘 외출로 어머니의 귀거래사는 몇 달간은 말씀안하시겠지. 무심한 모과나무 아래서 요양병원으로 휠체어를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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