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한인섭 편집국장

회인현 지진을 기록한 영조실록. /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회인현 지진을 기록한 영조실록. /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지진은 1천년전에도 사기(史記)에 꼼꼼히 기록했을 정도로 민감한 사안 이었다. 예나지금이나 인간생활에 밀접하기 때문이다. 

충북의 지진 역시 사기에 종종 등장했다. 삼국사기에는 고려 목종 4년(1001년) 중원부(中原府) 장연현(현 괴산군 장연면)에서 논 3결이 함몰돼 연못이 됐다(水田三結陷爲地)는 기록이 나타난다. 기사는 '그 깊이를 측량할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고려시대 토지 계량법은 토질과 시대에 따라 편차가 적지 않다. 그래서 '3결' 면적을 특정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어림잡아 수천평은 되는 면적일 게다.

조선왕조 실록에는 더 많은 지진 기록이 발견된다. 

임진왜란 이듬해였던 1593년(선조 4년) 충남 홍성에서 발생한 지진은 충북까지 영향을 미쳤다. 실록은 "우뢰와 같은 소리가 나고(有聲雨雷), 지상의 물건이 요동했다.(地上之物 莫不搖動) 하늘도 붕괴되는 것 같았다.(初疑天崩)"고 전했다. 1670년(현종 11년)  8월 충주에서는 인가(人家)의 벽과 담벼락이 무너지며 번개소리가 났다는 기록도 등장한다.

숙종 시절 충청권에서 지진이 유난히 많았다. 

1680년(숙종 3년)에 이어 1681년(숙종 4년 4월) 공청도(현 충청도)를 비롯해 전국적으로 발생했다. 1686년(숙종 12년) 4월 2일에는 문의 등 16개 읍에서 번개치는 소리와 함께 집들이 번쩍 들리는 것처럼 흔들렸다고 한다. 집이 흔들릴 정도였으니, 상당한 규모의 지진 이었던 모양이다. 실록은 작은 규모까지 기록했다. 1503년(연산 9년 1월 14일) 청주와 옥천, 문의, 회인, 보은, 청안, 연풍, 음성, 진천, 연기, 전의지역 등에서 신고가 접수됐다는 내용도 빼놓지 않았다.
 

한인섭 편집국장
한인섭 편집국장

실록은 그 시절 있었을 법한 대처법도 소개됐다. 세조 5년(1459년) 8월 4일 첫 기사는 '임금이 향과 축문을 내려 해괴제(解怪祭)를 지내게 했다'는 내용이다. 이 무렵 충청도와 전라도에 지진이 났기 때문이다. 보은과 회인, 괴산, 청안, 청주, 연기, 문의, 옥천, 청산 등에서 피해가 발생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단종 1년(1453년) 12월 9일 역시 해괴제를 지낸 기록이 첫번째 기사로 등장한다. 충청도의 문의·옥천 등에 지진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괴제는 말그대로 천재지변을 해소하려는 제사였다. 하늘에 호소하고, 백성들이 평상심을 갖게했던 '비타민' 이었다. 요즘의 '국가안전대진단'격의 행사던 셈이다. 

조선왕조실록은 1600년~1700년 사이 내륙지방에서 지진이 활발했던 점을 보여준다. 지난 2일 보은군 내북면 법주리에 이어 지난 4일 영동군 학산면 범화리에서 발생한 지진은 규모 2.5과 2.0 정도여서 심각히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만 보더라도 경각심은 늘 가져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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