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음

사람은 살다보면 크건 작건 실수를 범한다. 문제는 이러한 실수가 남에게 해를 미치면 이는 더 이상 실수가 아닌 과실이 된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실수가 아닌 의도가 다분한 가해가 이루어진다면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는 범죄다. 내가 이렇게 해도 상대방이 나에게 대항이나 거부를 밝힐 수 없다는 생각. 이것이 바로 요즘 회자되는 '갑질'이다.

갑질하는 사람의 유형을 가만히 살펴보면 권력과 돈을 양손에 쥔 인물들이 안하무인의 태도로 행동을 하고, 자신의 행동은 내가 지닌 특권이 부여한 당연한 것이라 치부한다. 그러니 남의 마음을 헤아리거나 배려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예전에는 갑질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군사정권하의 국민들이 그러했고, 왜곡된 자본주의사회에서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았던 우리 국민들이 그러했다. 이는 결국 국민의 행복수준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아닐까?! 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변했고, 사회가 변했고, 국민의 사고수준이 변했고, 생활수준이 변했다. 그럼에도 아직도 예전의 생각, 행동방식, 특권의식을 고수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나 보다. 아마도 시대에 뒤떨어진, 현재 대한민국의 국민을 제대로 바라볼 혜안이 없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아니! 대통령의 무능을 행동으로 탄핵시킨 이 땅 대한민국 국민의 수준을 뭘로 보고 아직도 이런 행태를 보인단 말인가? 참 한심하다. 땅콩이 부족해서 이제는 물인가?

이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이 시대를 정의할 필요가 있다. 현재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세계화, 정보화가 세계 최정상의 단계에 진입한 국가다. 특권이 아닌 보편적 인권이 확고히 자리잡은 나라다. 그러니 이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자신이 지닌 권리가 무엇이고, 권리가 침해를 받았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래야 갑질이 사라진다. 아마도 옛날에도 갑질은 있었나 보다. 『論語(논어)』에 나오는 고사를 소개한다.

배득렬 교수
배득렬 교수

春秋末期(춘추말기), 季孫氏(계손씨) 집안이 魯國(노국)의 조정 대권을 장악하고 차례차례 魯昭公(노소공)과 魯哀公(노애공)을 몰아냈다. 이때부터 季孫如意(계손여의)가 함부로 자신을 천자에 비교하면서 집안에 天子(천자)만이 향유할 수 있던 '八佾(팔일: 八行)' 대형 舞樂隊(무악대)를 만들었다. 孔子(공자)가 季孫氏가 마음대로 周禮(주례)를 심하게 위배한 사실을 알고 "이를 참는다면 무엇을 참지 못하겠는가(是可忍也, 孰不可忍)?"라고 말하였다. 그 의미는 季孫氏가 멋대로 천자만이 행할 수 있는 八佾의 舞樂隊를 사용하는 것을 용인할 수 있다면 어떤 일도 모두 용인될 수 있다는 것이다.

보라! 孔子를! 그는 권력의 날이 더욱 서늘했던 봉건시대에도 갑질에 분연히 저항한다. 분수를 넘은, 예의를 벗어난, 인간이 하면 절대 되지 않는 행동에 대해 공자는 그 어떤 주저함도 없이 적확하게 문제점을 지적한다. 이러한 이성적 용기가 있었기에 우리는 공자를 성인으로 추앙하는 것이 아닐까? 갑질은 바로 이성적 저항이 있어야 사라진다. 갑질에 저항조차 못했던, 갑질에 대한 문제의식조차 없었던 우리가 이성적 저항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인식하고, 분연히 모순에 떨쳐 일어날 때 시대를 모르고 갑질을 해대던 추리한 인간들의 설 자리는 더 이상 없다. 그래야 대한민국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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