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건제도아래 실시되었던 조선시대의 과거 시험에도 나름대로의 금기와 합격을 기원하는 주술적 믿음이 응시생에게 작용했고 시험지 바꿔치기 등 컨닝도 횡행했다.
 충북에는 남녘과 한양을 잇는 여러 고개가 있는데 대중가요에도 등장하듯 「추풍령(秋風嶺) 고개」는 대표적 고개임에도 남도 수험생들이 이를 꺼렸다. 이 고개를 넘으면 영락없이 추풍낙엽이 되어 과거에 낙방한다는 어떤 터부가 작용했다.
 그래서 많은 응시생들이 지름길인 이 고개를 외면하고 한발치 떨어진 괘방령(卦榜嶺)으로 발길을 돌렸다. 괘방령의 「괘방」이 의미하듯 이 고개를 넘으면 합격한다는 속설이 내려오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 시험 당일 아침에 미역국을 안 먹고 찹쌀떡을 먹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남녘의 수험생들 일부는 문경 새재나 이우리재(梨花嶺)를 넘을 수 밖에 없었다. 새재가 한양으로 통하는 가장 큰 길이나 삼관문의 검문이 심해 인근의 이우리재나 하늘재를 택하는 경우도 많았다.
 청운의 꿈을 안은 선비에게는 옷섶이나 소맷자락에 한 폭의 어해도(魚蟹圖)를 간직했다. 어해도란 잉어, 게, 가재 등 물고기를 그린 그림인데 이를 간직하면 합격의 행운이 찾아든다고 했다.
 소맷자락에 넣고 간간이 들여다 보는 좁쌀책은 컨닝 페이퍼로 돌변하는 수도 있었다. 깨알같이 적은 모범답안을 갖고 과장(科場)에 들어가 시험관이 한 눈을 파는 사이 슬쩍 훔쳐 보았던 것이다.
 시관으로 낙점을 받은 시험관은 새벽에 응시자들의 이름을 체크하며 극위(棘圍)라 불리는 시험장에 들여보냈다. 이때 수협관(搜挾官)은 응시생들의 옷속을 수색했다. 문서를 소지한 자가 있으면 구속했고 과장밖에서 이를 발각하면 한 식년(式年)의 응시자격이 상실됐다.
 선조 35년에 정시(庭試)에서 대리시험이 적발됐다. 으뜸을 차지한 응시생의 글씨가 당사자의 글씨가 아니라 그 하인의 글씨였다. 첫 장은 당사자의 글씨였는데 그 다음부터는 하인이 대필한 것이다.
 효종원년에는 임담이 청하여 시권의 겉봉에 쓰는 근봉(謹封) 두자를 적지 못하게 하고 도장을 새겨 과거 현장서 찍도록 했다. 응시자들이 재상 또는 명사에게 부탁하여 「근봉」글씨를 받으면 시관이 이를 눈치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다.
 그 지긋지긋한 입시철이 또 돌아왔다. 긴장을 다소 누그러트리려 함인지 입시철만 되면 합격엿, 찰쌉떡 등이 동이 날 정도다.
 신세대에게 합격엿이나 찹쌀떡 등은 이미 한물 간 선물이다. 종전에는 1만원 이내의 상품이 대종을 이뤘으나 이제는 8~9만원을 홋가하는 상품이 등장하고 있다. 또 행운을 가져다 준다는 「미화 2달러 지폐」상품까지 등장하는가 하면 도끼와 망치, 흡인용 고무컵, 포크 모양의 엿 등 엽기적 상품도 등장하고 있다한다. 이런 상품은 어디까지나 애교에 그쳤으면 한다. 합격은 오로지 노력의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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