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城)이 있으면 성문이 있기 마련이다. 산성이든 읍성이든 문없는 성은 없다. 성문터를 알리는 표석이말해주듯 청주읍성에는 번듯한 4대문이 있었다.
 청주읍성의 대표적 문인 남문은 청남문(淸南門)이라하여 조흥은행앞에 있었고 주위로 남문을 보호하는 옹성(擁城)이 있었다. 옹성은 독을 반으로 쪼갠듯한 모양으로 외적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처했다.
 청주백화점 어귀에 있는 동문은 벽인문(闢寅門)이라 했다. 혹간 개인문(開寅門)으로 표기된 문헌도 있으나 이는 청주읍성도를 잘못 판독한 것 같다. 벽인문의 벽(闢)은 푸르다는 뜻으로 푸른 색은 동쪽을 의미한다. 또한 10간 12지에서 인(寅)은 동쪽을 가리킨다.
 동문은 문루가 자주 허물어진데다 청주목이나 읍성의 병영과 가까워 잘 사용치 않았는데 일설에는 『과거에 급제하는 사람들이 줄어든 것은 이 때문이다』하여 문루를 복원하고 한때 문을 열었었다.
 북문은 현무문(玄武門)이라하여 구 히아신스 예식장 앞에 위치해 있었다. 서문은 지금 서문동 5거리, 속칭 족발골목 입구에 위치했다. 조선시대에는 이를 청추문(淸秋門)이라 했는데 동문에서와 마찬가지로 지도 판독을 잘못하여 청서문(淸西門)으로 기록한 문헌도 가끔 보인다. 임란당시 조헌 의병장 등은 서문 밖에서 진을 치고 공격을 퍼부어 청주성을 탈환했다.
 지금 우리가 보편적으로 부르고 있는 남문, 북문 등은 방위개념을 도입한 일본식 명칭이어서 옛 이름 그대로 청남문, 벽인문 식으로 부르는게 마땅하다.
 청주읍성의 크기는 시대에 따라 개축을 빈번히 한데다 영조척(營造尺), 포백척(布帛尺) 등 도량형기가 달랐기 때문에 여러 기록이 다르나 대체로 환산해 볼때 둘레는 1천7백m, 높이 2.5m쯤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읍성은 경주의 방리제(坊里制)를 채택하여 남북과 동서가 십자로 처럼 기획된 계획 도시의 모양을 갖추고 있었다.
 만약 이 성을 관아·병영과 더불어 헐지 않았더라면 청주의 엄청난 문화유산이 되었을 것이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도 장관으로 부임한 일인 스즈키(鈴木隆)는 시가지 개정이라는 미명아래 청주읍성을 허물고 성돌로 하수구를 쌓았으니 참으로 기막힌 일이었다.
 그로부터 90여년이 지난 오늘날 청주읍성의 4대문만이라도 복원하자는 문화재 보호운동이 뜻있는 사람들과 학계 일각에서 일고 있다.
 사실상 1천7백m에 달하는 청주읍성을 복원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에따른 토지매입비만 따져도 천문학적인 액수에 달하기 때문이다. 청주읍성의 전체적인 복원이 어렵다면 최소한 4대문 만이라도 복원했으면 한다. 그리고 읍성의 모습은 구조물이나 건물주의 협조를 얻어 담장 벽화로 처리하는 방안도 모색해 볼만하다.
 그래야만 고도 청주의 모습이 산다. 육거리 일대에 묻힌 남석교의 발굴 복원과 더불어 청주읍성의 복원은 역사도시 청주를 가꾸는 아주 중요한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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