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변광섭 컬처디자이너·에세이스트

9회 세종대왕과 초정약수 축제가 펼쳐지고 있는 충북 청주시 내수읍 초정문화공원 일원에서 30일 오후 조선의 마지막 황손인 이석 씨가 세종대왕 역할을 맡아 세종대왕 어가 행차를 재현하고 있다. 2015.05.30.  / 뉴시스
9회 세종대왕과 초정약수 축제가 펼쳐지고 있는 충북 청주시 내수읍 초정문화공원 일원에서 30일 오후 조선의 마지막 황손인 이석 씨가 세종대왕 역할을 맡아 세종대왕 어가 행차를 재현하고 있다. 2015.05.30. / 뉴시스

제1경 초정약수. 드넓은 탕마당에 우물이 세 개 있었는데 상탕은 세종대왕이 안질 등을 치료했던 곳으로 초정영천이다. 중탕은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려 마시는 곳이고, 그 옆에 돌계단을 밟고 내려가면 바위틈 사이로 흐르는 물맛이 삼삼했다. 하탕은 노천탕이었다. 세종대왕은 1444년에 행궁을 짓고 두 차례에 걸쳐 121일간 머무르며 요양을 했다. 조선의 르네상스를 실천했다. 제2경 구라산성. 구라산성은 신화와 전설의 숲이다. 아홉 딸과 한 아들에 대한 전설, 삼국시대 쌓았다는 성곽의 비밀, 고단한 삶의 쉼표를 만들고 여백의 미를 찾기 위한 세상 사람들의 발걸음, 그리고 수백 년 수령의 소나무가 의연하게 굴곡진 역사를 지키고 있다. 임금이 자주 올랐다는 승어골도 있다.

제3경 저곡리 풍경. 농민들에게 농사는 경전이고 종교이며 운명이다. 마을 입구에 보호수인 회화나무가 늠름하다. 회화나무는 과거급제를 하거나 큰 벼슬을 하는 사람이 생길 때 심는 나무다. 닥나무가 많아서 저곡(楮谷)리다. 100년 된 방앗간 풍경이 주민들의 사랑방으로, 마을카페로 변신했다. 제4경 운보의 집. 운보는 말년에 어머니 고향인 형동리 산자락 12만㎡에 전통한옥을 비롯해 미술관, 조각공원 등을 꾸몄다. 운보가 생전에 생활했던 모습과 창작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유품들이 있다. 말 대신 붓끝으로 세상과 뜨겁게 소통하고 사랑했던 운보의 생을 만나보자. 축복은 기적처럼 오고 사랑은 별빛처럼 쏟아지는 것이다.

제5경 비중리 석조여래삼존상, 석조여래입상. 어머니의 자애를 보는 것처럼 마음까지 포근하다. 비중리 입구에 있는 보물 제1941호 석조삼존불좌상과 석조여래입상은 돌을 다듬어 만든 불상이다. 그 앞에 서면 석공의 미세한 떨림이 끼쳐온다. 석공의 귀재는 새를 깎아 하늘에 띄운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두 손 모아 기도했을까. 곡진한 마음이 끼쳐온다. 제6경 홍양사와 삼세 충효문. 홍양사는 안정라씨(安定羅氏) 조상의 공덕을 기리는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무려 15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했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보위하며 식량조달에 힘쓰고 좌의정에 오른 사람도 있다. 문인으로 도학이 깊은 사람, 의인으로 명성을 높인 사람도 있다. 삼세 충효문은 이 동네 나사종 가문의 삼세대에 걸친 충효정신을 기리는 곳이다.

제7경 의병장 한봉수 장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내수읍 세교리에서 태어난 한봉수는 어려서부터 날렵했다. 별명이 번개대장이었다. 일제의 반격이 거세지자 무기와 연장으로 무장했다. 일제가 오가는 길목에 밤낮으로 진을 치고 있다가 맞서 싸웠다. 1907년부터 1910년까지 그 싸움만 해도 30여 차례에 달했다. 기습과 변장 등 유격전술에 뛰어난 명장이었다. 제8경 독립운동가 손병희 생가. "사람이 곧 하늘이다." 의암은 3·1운동과 동학농민운동 지도자다. 의암은 1882년(고종19) 20세 때 동학에 입교, 2년 후 교주 최시형을 만나면서 빼앗긴 조국을 찾는 일을 시작했다. 1906년에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제3대 교주에 취임, 교세확장운동과 교육문화 사업에 전념했으며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3·1운동을 주도했다.

변광섭 에세이스트
변광섭 에세이스트

제9경 최명길과 전주최씨 세거지. "대감은 이 문서를 찢지만 나는 주워 맞추리다." 병자호란 때 청의 침략이 시작되자 최명길이 항복문서를 썼다. 최명길은 쇠퇴해 가는 명에 대한 의리만 지킬 것이 아니라 새롭게 부상하는 청과의 관계 정상화를 촉구했다. 그는 위태로운 나라를 살리는 길은 의리와 명분이 아니라 실리와 자강(自强) 뿐이라고 했다. 지혜로 빛났고 위기의 나라를 찾고자 했던 그의 정신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제 10경 증평 좌구산과 김득신. 김득신은 59세에 이르러서야 과거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갔다. 시 1,588,수와 글 182편이 실린 <백곡집>과 시 비평집인 <종남총지>를 남겼다. 효종은 "당시(唐詩)에 넣어도 부끄럽지 않다"며 칭찬했다. 삼기저수지와 김득신공원을 지나면 좌구산휴양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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