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세이] 김윤희 수필가

할머니들의 소풍날이다. 아침에 일어나 현관부터 열어보니 날씨가 좋다. 몇몇 회원들과 어르신들을 모시러 갔다. 장터글방 경로당이 꽃밭이다. 빨간색, 핑크색, 파랑, 초록, 베이지, 형형색색 옷차림에 스카프를 두르고 모자까지 갖춰 한껏 멋을 낸 어르신들이 꽃처럼 앉아 환하게 반긴다. 

죄다 빨간색이라 당신은 얼른 집에 가서 베이지색 점퍼로 갈아입고 나왔다는 어르신의 센스가 단연 돋보인다. 80이 넘으신 연세에도 미적 조화를 생각한 것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아침에 곱게 단장을 하고 집을 나서며 어떤 기대와 생각을 가졌을까. 살짝 걱정스러우면서도 멋스런 차림새로 보아 소풍이라는 말 자체만으로도 설레는 마음이었음이 읽힌다.

"애들 어렸을 때 말고는 어디 소풍을 가 봤나, 내 소풍은 생전처음이지"

아이들 마냥 들뜬 목소리로 차안에서 이야기 나누는 틈새에 끼어 나도 모르게 수다가 더해진다. 백곡저수지 길을 끼고 도는 산야가 연초록 물결로 남실남실 축복을 보낸다. 

목적지인 만뢰산 자연생태공원은 이미 따사로운 햇살이 가득 내려앉아 있다. 꽃잔디, 영산홍, 철쭉은 아름다움의 절정을 넘겨 발치에 무덕무덕 꽃잎을 쏟아내고 있었다. 꽃 진자리에 돋아 오른 연초록 잎도, 키 큰 나무의 여린 잎새들도 일제히 작은 손을 흔들며 어르신들을 반겨 맞는다. 

가까운 곳에 이런 데가 있는 줄 몰랐다며 공기도 좋고 공원이 예쁘다고 자연의 손짓에 맞장구를 친다. 진천에서도 가장 청정한 지역에 살고 있는 분들이지만 느껴지는 공기 맛이 신선했던 모양이다.

만뢰산 자연생태공원은 2009년도에 조성됐다. 자연을 많이 훼손하지 않고 자연지형을 살려 만든 것이 특징이다. 산 밑으로 계곡물이 흐르고 산길 산책로를 따라 야생초화원, 자생수목원, 밀원식물원, 습생초지원 등이 잘 정비되어 있다. 너른 잔디광장 중간 중간 정자 쉼터를 만들어 놓아 가족들이 도시락을 먹으며 즐기는 모습이 종종 눈에 띈다. 봄 습지에는 개구리, 도롱뇽 알을 보며 자연 생태를 관찰할 수 있어 꼬마 손님들이 줄을 잇는다. 한여름 물놀이 체험장과 연못의 물레방아 역시 애, 어른 할 것 없이 좋아한다. 

볏짚으로 지붕을 해 이은 정자 옆에 돗자리를 폈다. 넓게 펼쳐진 잔디밭과 주변 꽃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자연탐방로 산책에 나섰다. 야트막한 언덕길 양 옆으로 껑충 키 올린 감나무, 꽃사과, 아그배 나무와 발치에서 지고 있는 꽃잔디가 아직 볼만하지 않느냐며 발목을 잡는다. 

그 앞에서 휴대폰 사진기를 들이대니 어르신들이 45도 각도로 몸을 돌리고 조르르 서서 팔짱을 낀다. 60년대 버전이다. 렌즈 안에 들어온 여인들은 영락없는 20대 아가씨들이다. 늙은이가 뭐 이쁘다고 자꾸 사진을 자꾸 찍느냐고 하면서도 여전히 렌즈 안으로 몸을 넣는다. "나는 꽃이 좋아" 하면서 꽃무리 속에서 함박웃음을 짓는 여인 역시 한 송이 꽃이다.

한두 뼘씩 올라와 자리를 틀어잡고 있는 야생화 단지에 이르니 구절초, 쑥부쟁이, 벌개미취 등 이름을 확인하며 먹는 나물이다, 아니다. 의견이 분분하다. 이럴 땐 삶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살아온 억척 아줌마의 모습이 역력히 드러난다. 뭔지 모를 애잔함이 함께 몰려온다.

힘들지 않은 코스를 돌아 나오니 아래쪽 잔디밭에 올망졸망한 꼬맹이 무리가 앙증맞게 아장거린다. 어린이 집에서도 소풍을 왔나 보다. 선생님들 일부는 애기 기저귀 갈아주기에 바쁘다. 어르신들 눈에 그 모습도 한없이 예뻐 보이는지, 흐뭇하게 바라보는 눈빛에 자애가 흐른다. 서너 살쯤 돼 보이는 아이들이 그대로 한 무더기 꽃잔디로 피어난다. 

돗자리에는 어느새 점심 준비가 되어 있다. 바지런한 여인들이 모듬모듬 음식은 담아낸다. 소풍 하면 빠질 수 없는 김밥을 비롯하여 갖가지 반찬에  송편과 과일을 차리고 보니 그런대로 그득하다. 그 중에 제일 환대 받은 것이 아욱국이다. 들밥하면 아욱국 아닌가. 

어른들의 시중을 들어주며 함께 하는 젊은 여인들은 흐드러지게 핀 영산홍이요, 철쭉이다. 모두 착하고 순수해 보인다고 딸 삼았으면 좋겠다는 어르신들 역시 꽃이다. 염치와 겸손을 알고 배려하며 다소곳이 피어 있는 할미꽃이다. 비록 겉모습은 볼품없는 것 같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융단같이 보드라운 자주색 속살을 가진 고운 꽃이다. 가슴 깊이 "공경"과 "슬픈 추억"이라는 꽃말을 지닌 할미꽃이 바로 우리네 어머니 아닌가. 꽃잎 진자리에 하얀 머리칼이 대신하고 있지만, 이들의 가슴 한켠에는 아직도 자줏빛 꽃잎이 발딱발딱 소녀의 숨결로 살아있음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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