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238> 백제유물 전시관
<역사산책 238> 백제유물 전시관
  • 임병무
  • 승인 2001.1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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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혼이 깃든 마한(馬韓)의 옛 땅...」충북도민의 노래가 말해주듯 청주를 비롯한 미호천 상류지역은 마한이라는 부족국가가 있던 곳이다. 삼국의 강력한 왕권이 형성되기전, 한반도 중심 이남에는 진한, 마한, 변한이 있었는데 청주 일대는 마한의 영역이었다.
 마한에는 54개 부족국가가 있었는데 수장이 되는 국가를 목지국(目支國) 또는 월지국(月支國)이라 했다.
 삼한(三韓)을 가리켜 흔히 원삼국(原三國)이라 불렀다. 마한은 농경문화권에 있었다. 따라서 마한의 문화는 농경과 연관되는 토기의 문화권이었다.
 1~2세기 까지 평화롭게 토기를 빚고 농사를 짓던 마한땅에 어느날 전쟁의 나팔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3~4세기에 이르러 강력한 철기문화를 바탕으로한 백제가 이곳을 쳐들어 온 것이다. 마한의 토기문화는 이로써 마침표를 찍고 이른 백제의 철기문화권에 편입된다.
 사적 제 319호로 지정된 신봉동 백제고분과 봉명동, 송절동에 있는 고분의 출토유물은 이 고장 역사의 이어달리기를 그대로 말해준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청주공단과 맞바라보고 있는 송절동 고분은 원삼국 시대의 고분이다. 무덤의 규모가 삼국시대 토광묘보다 크고 관(棺)도 훨씬 크다. 여기서 출토되는 토기도 이른 백제시기의 토기보다 더 크다. 대개 목 짧은 항아리류가 주종을 이루는데 주둥이는 나팔처럼 벌어져 있다.
 봉명동 유적은 구석기부터 신석기, 청동기, 삼국시대, 고려, 조선을 아우르는 방대한 유적이다. 등고선을 따라 야산 기슭에 펼쳐진 주거지와 무덤이 수백기에 이른다. 미호천 유역의 구릉지대에서 터를 잡아 살던 이들은 비록 주민등록이 없었다해도 최초의 청주시민인 것이다.
 그 산기슭을 지나 신봉동, 중부매일 맞은편에 이르면 이른 백제시대, 토기문화와 철기문화의 융합상이 그대로 드러난다. 지난 82년 충북대박물관의 첫 발굴이래 무려 다섯 차례나 발굴조사를 실시한 곳이다.
 신봉동 고분은 토기의 보고(寶庫)다. 목짧은 항아리에서 부터 쇠뿔손잡이가 달린 토기, 오늘날의 생맥주컵을 연상케 하는 손잡이 토기, 계란 모양의 토기, 속이 깊은 바리형 토기 등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대개 산 아랫쪽 고분에서는 토기가 많이 나오고 윗쪽으로 올라갈수록 기마집단의 무구류(武具類)가 토기와 함께 출토된다.
 둥근손잡이가 달린 긴칼(환두대도), 말재갈, 창, 등자, 화살촉 등 철기집단의 유물은 이른 백제가 토착민을 정벌하고 이곳을 백제의 영토에 편입시켰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특히 쇠갑옷의 출토는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 함안 등 가야지방에서는 쇠갑옷, 말갑옷 등이 여러점 출토된바 있으나 내륙 깊숙한 청주에서 당시의 쇠갑옷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개관을 한 청주백제유물전시관은 원삼국에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청주지역의 역사를 담는 큰 그릇이 되었다. 더구나 그 전시관은 딴 곳이 아니라 현장에서 문을 열었기 때문에 더욱 값진 의미를 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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