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물과 성(城)이 삼위일체가 되어 만나는 곳이 청원 부강이다. 금강의 상류로 강건너 부용산을 마주 바라보는 곳이다.
 근대화 이전, 부강은 청주의 숨통 역할을 했다. 군산에서 출발한 소금배가 내륙 깊숙이 바다의 짠내음을 밀어 올리던 곳으로 경부선이 개설되기 이전까지 부강 구들기 장터, 개펄 시장은 북어, 명태가 헤엄을 치듯 했다.
 부강의 이러한 지형적 특성때문에 삼국은 이곳서 교두보를 확보하기에 혈안이 되었다. 곰내(熊川)을 사이에 두고 수많은 산성이 도열해 있는 까닭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주변의 대다수 산성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신라, 백제 계열이 주류를 이루는데 유독 부용면 부강 5리에 있는 남성골 산성에서는 고구려 계열의 토기와 구들이 중점적으로 출토된다.
 왜 그럴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고구려가 남하하여 신라, 백제를 공략했다는 증거다. 이곳에서 나온 밑면이 평평하고 몸체가 길은 「평저장동옹 토기」, 「가로띠 손잡이 토기」 등은 전형적인 고구려 계열의 토기다. 고구려 계열의 구들과 토기가 출토된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충북이 삼국의 접경지대라고는 하나 이렇게 금강상류까지 진출할 줄은 예견하기 힘든 일이었다.
 청주지역에서 고구려의 흔적은 청원 비중리 일광삼존불, 그리고 청주의 고구려 지명이 낭비성(娘臂城)이었다는 정도인데 청주에서 가까운 부강에서 그 확실한 남하 증거가 포착된 것이다.
 남성골 산성은 기존의 문헌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1994년 청주대 박물관 학예사인 박상일씨와 청원군 공보실에 근무하는 이규상씨에 의해서 1천5백년의 베일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청원 IC에서 부용간 도로확장 공사로 충북대박물관(책임조사원·차용걸)에 의해 발굴조사된 남성골 산성은 5세기를 전후한 청주지방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있다.
 해발 1백m의 구릉지역에 판축(版築)을 하지않고 성안의 흙을 깍아 성벽을 쌓고 할석(割石)을 덧씌운 삭토(削土) 공법이라든지 수많은 목책 구덩이및 성 둘레를 돌아가며 파놓은 구덩이(환호·環壕)는 한국성곽의 시원적 성격인 고식에 속한다.
 성 둘레에 파놓은 환호와 목책은 적을 방어하는데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적병이 구덩이에 빠지기도 하고 목책에서 헤메는 동안 효과적으로 적을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집자리와 가마터, 교구(허리띠 버클) 화살촉 등 출토유물은 당시의 생활상과 전투상황을 그대로 말해준다.
 남성골 산성을 중심으로하여 주변에는 산성이 말발굽처럼 들어서 있다. 동쪽으로는 성산성이 은적산의 저산성과 연결되고 쪽도리산성(복두산성), 독안산성이 버티고 있다. 남쪽으로는 성재산성, 노고산성, 애기바위산성, 테뫼산성 등이 산맥의 능선을 붙잡고 있다. 게다가 문곡리의 대국터(大國垈) 등 연개소문과연관된 여러가지의 전설이 현지서 구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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