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문인중에 담배를 가장 사랑하고 많이 피운 사람은 단연 오상순(吳相淳)이다. 평생을 방랑과 담배연기 속에서 보낸 그는 목욕탕에 들어갈때도 담배 몇 개피를 가지고 들어갔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래서 그의 호(號)마저 숫제 공초(空超)로 정했다.
 지난해에 91세를 일기로 타계한 서번(西蕃) 박재륜(朴載崙) 시인은 골초는 아니었으나 담배를 즐겨 피웠다. 칠순을 맞아 발간한 「흰수염 갈대풀」이라는 시집이 있는데 표지에 실린 그의 사진이 인상적이다. 갈대풀을 연상케하는 백발에다 피워 문 담배연기가 시어(詩語)처럼 하얗게 번지고 있다.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 의하면 담배는 광해군 말년부터 성행하기 사작했다고 한다. 남쪽에 있는 담파국(湛巴國)에서 전래되어 「담파」를 거쳐 담배로 불리웠다는 것이다. 또 일설에는 타바코-타바-담배가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춘향전에는 「담배타령」이 등장한다. 『한참 이러할제 한 농부 썩 나서며/ 담배 먹세, 담배 먹세, 갈 멍덕을 숙여 쓰고 두던에 나오더니/ 곱돌로 만든 담뱃대를 넌즛 들어 꽁무니 더듬어서/ 가죽 쌈지 빼어들고...중략...농사꾼이라 하는 것이/ 대가 빽빽하면 쥐새끼 소리가 나겠다/ 양볼때기가 오목오목 콧구멍이 발심발심하며 연기가 훌훌 나게 피워 물고 나서니...」
 이처럼 담배는 사대부는 물론이요, 농부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사랑을 받아온 기호품이었다. 동지섣달 긴긴 밤의 독수공방도, 농삿일의 고달픔도 어루만저 주는게 담배였다.
 처어칠은 대단한 애연가였다. 여송연을 즐겨 피운 처어칠의 입과 코는 노르망디 전장에서 피어 오르는 포연처럼 니코친의 굴뚝이었고 그러한 모습은 처어칠의 캐릭터인양 평생을 따라 다녔다.
 처어칠과 더불어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아이젠하워 또한 애연가였다. 그는 하루에 세갑 정도의 담배를 피웠는데 심장이 나빠지자 담배를 끊었다.
 오스카 와일드는 언제나 주머니 가득 담배를 넣고 다녔다. 친구들과 얘기를 하다 담배가 떨어지면 온 방을 헤메며 꽁초를 다시 주워 피웠다.
 「담배를 끊는다는 것은 내가 겪은 일중에서 가장 쉬운 일이었다. 나는 그것을 천번이나 끊었기 때문이다」 마크 트웨인은 금연의 어려움을 이렇게 역설적으로 말했다.
 베트남 등 남국으로 가면 담배를 피우는 어린이들이 상당수다. 그것은 니코친 중독에 1차 원인이 있는 것이지만 열대림의 해충이 담배연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코메디언 이주일의 폐암으로 금연운동이 번지고 있다. 각급학교는 학교에서 일체 담배를 피우지 못하도록 금연구역을 선포했다. 금연 건물과 더불어 금연시 인센티브를 주는 기업도 늘어나고 있다. 백해무익한 담배인줄 알지만 습관성때문에 금연이 쉽지 않다.
 맑은 공기속에서 모두가 건강한 삶을 누리도록 올해는 애연가들의 금연이 성공을 거두기 바란다. 금연의 성패는 모름지기 각자의 의지에 달린 것이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