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이명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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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는 시간을 때울 겸 커피숍에 들어갔다. 아메리카노를 주문해놓고 테이블에 앉아 스마트폰을 조작한다는 게 막 받은 진동벨을 조작하고 있었다. 내 모습에 내가 놀랐다. "무의식까지 침투했단 말인가. 이런 문화가 십년, 이십년 지속된 후엔...끔찍하단 느낌이..." 스마트폰 비슷하게 생긴 진동벨을 사진으로 찍어 페북에 띄우며 적었다.

"요즘 저는 스마트폰을 어디에 둔지 몰라 찾을 때 무척 불안합니다." 페친의 댓글이 올라왔다. "저는 글 쓰거나 뭐에 집중할 땐 스마트폰을 뒤집어 놓습니다. 일종의 약한 제례 의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답글로 쓴 것이 마음에 들었다. 종교학자 엘리아데는 <성과 속>이란 저서에서 속(俗)에도 성(聖)이 있다고 한다. 성스러움은 세속적인 삶과 더불어 나타난다고 보는 것이다. 나는 그 알량한 지식을 나의 사소한 행위에 덧씌운 것은 아니다. 글을 쓸 때 스마트폰을 뒤집는 것에 의지 이상의 느낌이 있어 왔다. 주관적이겠지만 제례 의식이라고 표현되자 틀리진 않아 보였다. '약한'이라는 형용사를 붙였으니 오버하는 것 같지 않고 있는 그대로가 제법 나온 듯 했다.

지하철에 오르면 스마트폰을 검색하는 사람들이 열에 예닐곱은 된다. 그 경향을 무조건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손 안의 그 우주에서 자기만의 여행을 할 것이다. 모르는 지식의 섬에 닿을 수 있고 연인과 애틋한 정을 나눌 수도 있다. 그런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굳이 진화심리학의 이야기를 들지 않더라도 현대인들은 진화된 몸의 구조에 비해 과도한 정보를 접하고 있다. 그 부작용이 개인적으로건 사회적으로건 나타나고 있다. 진동벨을 스마트폰인양 만지작거리는 내 꼴이 그것 아닌가. 스마트폰에 빠져 있다가 뭔가 전환점을 만들고 싶을 때 그것을 뒤집는 행위가 싸인이 되어 새로운 세계로 진입할 모티프는 적어도 될 것이다.

'물건 하나 뒤집는 거 가지고 뭐 대수라고!' 이런 빈정을 받을 수도 있다. 사람에 따라선 필요시에 스마트폰을 끄기도 하고 잠금 어플을 사용하기도 할 것이다. 스마트폰의 폐해가 극심해진다면 산업혁명 초기의 러다이트 운동 같은 것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만 스마트폰의 경우는 그럴 것 같지는 않다. 뒤집는 행위는 이런 것들에 비해 미온적이지만 내겐 강렬한 느낌이다.

고대 사회 및 종교 문화 특유의 제례 의식의 주인공이 되는 기분과 멀지만은 않다. 스마트폰의 중독성이 나의 무의식까지 파고 들었다면 무의식엔 이처럼 또다른 심연이 존재하는 것이다. 약하다는 표현이 품고 있는 바 예술적이거나 문화적인 향기가 생성될 여지 또한 된다. 종교와 예술, 문화는 근원적인 면에서 통하기 때문이다. 이런 느낌이 어찌 나에게만 국한될 것인가.

일만 시간의 법칙처럼 몰입의 시간이 강조되던 시기가 있었다. 더 창조적이 되려면 그것으론 안되고 일만 시간의 몰입의 시간의 1.25배 즉 1만 2500시간의 의도적 휴식이 중요하다고 하는 책도 최근에 나왔다. 휴식을 위해선 멈춤이 필요하다. 의도적 몰입과 의도적 멈춤의 변증법적 실천이 인생을 예술품으로 만드는 길 중 하나라고 본다면 스마트폰에 지나친 시간을 빼앗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비즈니스 모임 같은 것이 아닌 일상의 모임에서도 테이블 위에 스마트폰을 자제하는 문화가 자리를 잡아간다면 스마트폰을 쳐다보다가 얼굴을 쳐다보곤 하는 경박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스마트폰 소비자의 입장에서 벗어나 한갓 기계인 그것을 그 바깥에서도 능동적으로 다룸으로써 잃고 있는 소중한 정서를 되찾을 길 역시 열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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