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나그네에 나침판이냐, 항구 잃은 연락선에 고동이드냐』 60년대를 풍미한 매혹의 저음가수, 남일해의 히트곡 「이정표」의 노랫말이다.
 「서울 몇 km」 등 근대적인 이정표가 나오기 이전엔 어떻게 도로의 거리를 표시했을까. 그 방법의 하나가 바로 장승이다. 경국대전에도 나와 있듯 조선시대에는 30리마다 장승을 세워 오가는 길손의 나침판 역할을 하도록 했다. 이정표의 역할이 장승이 가지고 있는 기능중 하나였다.
 장승은 목장승과 돌장승이 있다. 어느 장승이 먼저 등장했는가는 확실치 않지만 아마도 다루기가 쉬운 목장승이 먼저 나온듯 싶다. 그러나 신라시대에도 돌장승이 있었다는 기록을 보면 이를 단언하기는 어렵다.
 장승은 여러가지 의미를 갖고 있는 민간신앙의 복합체다. 멀게는 청동기시대의 선돌, 그리고 삼한시대의 솟대와 맥락을 닿고 있다. 거리를 표시하는 이정표(Land mark)와 마을 공동체 신앙으로서의 액막이 기능을 따져보면 선돌의 변형된 형태를 읽을 수 있고 하늘을 향한 인간의지의 표현, 안테나로서의 구실, 마을 공동체로서의 묶음, 기자(祈子)신앙 등을 보면 선돌과 솟대의 또다른 바리에이션(변주곡)으로서 감지되는 것이다.
 아무튼 장승의 기능은 농경사회, 공동체를 형성하는 유·무형의 끈이다. 핏줄과 핏줄을 연결하고 이웃과 이웃을 이어주는 샤마니즘적 축으로서 각인되어 왔다. 현대미술을 보는듯 단순화된 조형은 미술사적인 입장에서도 연구해 볼만하다.
 부리부리한 눈과 코, 양각과 음각을 혼용한 얼굴표정,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 등 몸체에 새긴 각자 등 장승의 모습은 풍파에 깎여 나갔지만 장승에 내재된 민간신앙의 유습은 정초에마을주민의 장승제가 말해주듯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지역마다 약간씩 다르기는 하나 장승에는 여러 전설이 얽혀 있다. 어느 누가 한 밤중에 대취하여 밤새도록 씨름을 하고 허리띠로 상대방을 묶어 두었는데 동이 트자 그 자리에 장승이 서 있더라는 것이다.
 장승은 불교와도 융합되어 「돌미륵」「벅수」등으로도 불린다. 법수보살은 불법수호의 기능을 갖는데 음운의 변화를 거쳐 「법수」가 「벅수」로 된 것이다.
 돌장승도 60년대 새마을운동 과정에서 적잖게 수난을 겪었다. 장승이 쪼개져 하수도 공사에 이용되기도 했고 마을입구로 옮겨져「하면된다」등의 새 글귀가 새겨지기도 했다.
 음성군 원남면 마송리(오미마을)에 하천 뚝을 따라 3기의 돌장승이 있는데 고졸(高拙)한 맛을 주는데다 보존상태가 그런대로 양호하다. 돌장승 1,2,3호가 100m 간격을 두고 마치 민속놀이 이어달리기를 하는 듯 하다. 장승 1호는 미륵형태다. 머리에 관을 쓰고 이마에는 백호(白毫)가 있다. 눈과 눈썹은 팔짱을 낀 모습이다.
 돌장승은 여기서 걸음을 멈춘다. 오미마을 윗쪽으로는 돌장승이 더 이상 눈에 띄지 않는다. 이번에 문화재(민속자료 제 12호)로 지정되길 천만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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