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리코, 고통.죽음.구원 함축 '메두사호 난파 실상'그려
당시 관료들 부정부패.윤리 저버린 반인륜적 만행 폭로

제리코 작 메두사의 뗏목
제리코 作. 메두사의 뗏목

필자는 지난 연재에서 제프 월의 <죽은 군대는 말한다>를 어느 신문에 실린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사진을 모델로 삼아 작업한 일종의 '연출사진'이라고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것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신문지상에 인쇄된 전쟁 사진에 명화를 접목시킨 것이다. 제리코(Theodore Gericault)의 <메두사의 뗏목(The Raft of Medusa)>(1819)이 그것이다.

메두사의 뗏목? 그것은 월의 <죽은 군대는 말한다>처럼 실화를 소재로 그린 그림이다. 프랑스 루이18세는 아프리카 세네갈을 식민지로 삼아 제국주의를 다시 확대할 계획이었다. 1816년 여름, 프랑스는 그 첫 출항으로 거대한 군함을 대서양에 띄우는데, 그 군함의 이름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 메두사였다.
 
메두사호의 선장은 루이18세의 측근인 쇼마레였다. 그는 대혁명으로 인해 오랫동안 실직했던 '낙하산 선장'으로 일명 '관피아'였다. 쇼마레 선장은 정원 외의 사람들을 돈을 받고 승선 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원래 군함이었던 메두사호를 객선으로 개수하면서 배의 안전에 위해를 가할 수 있는 변경도 이루어졌단다.

당시 식민지 개척은 부를 보장받는 것이었기에 돈에 눈 먼 사람들로 가득했으며 결국 이익을 위해 돈으로 관료를 매수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메두사호에는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의 세네갈에 정착할 이주민과 군인 그리고 행정가 등 400여 명이 타고 있었다. 하지만 선장의 미숙함과 무능함은 곧 파멸로 이어졌다.

1816년 7월 2일 메두사호는 항해 중 암초에 걸려 침몰하게 된 것이다. 고위 관료와 장교를 및 고급 선원 230여명은 6개의 구명정에 나누어 타고 대피한 반면, 나머지 사병과 일반서민 149명은 배의 잔해로 뗏목을 급히 만들어 몸을 싣게 된다. 원래 뗏목을 밧줄로 구명보트에 연결해 가기로 했는데, 선장이 이 밧줄을 잘라내고 도망갔다.

결국 149명은 급조된 뗏목을 타고 표류하게 된다. 하지만 뗏목에는 마실 것도, 먹을 것도 또 방향을 잡을 키도 없이 무작정 바다를 떠다니다 작열하는 태양열 아래 갈증과 질병으로 사망자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표류 13일째 이아르귀스호에 의해 극적으로 구조되지만 당시 생존자는 15명이었다.

더욱이 그들 중 4명은 구조 당일 사망했고 이후 한명이 추가로 사망해 최종 생존자는 단 열 명이었다. 하지만 최후 생존자 10명도 그 두려웠던 시간의 충격을 이기지 못해 모두 정신적 고통을 보였다고 한다. 당시 루이18세 정부는 메두사호 난파 사건을 대충 덮고 넘어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메두사의 뗏목에서 살아남은 한 생존자가 그 경험담을 폭로하면서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다. 149명이 15명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낱낱이 밝혀진 것이다. 동료를 죽이고 심지어 동료의 시체까지 먹었던 일들이 공개된 것이다. 그리고 국가와 사회 지도층의 부조리가 드러나 여론의 지탄을 받게 되었다.

더욱이 아르고스 호는 인명구조보다는 일차적으로 메두사호에 실려 있던 왕실 금고를 회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현장으로 출동한 것으로 밝혀졌다. 프랑스 혁명을 통해 민권 의식에 눈을 뜬 프랑스 국민과 신문들의 분노는 정부를 압박하여 진상조사를 하게끔 만들었다.

결국 루이18세는 쇼마레를 법정에 세웠다. 하지만 선장은 금고 3년형에 처해졌을 뿐이다. 메두사호 난파 사건이 일어나고 3년이 흐른 1819년 28세의 젊은 화가 제리코는 슬픔, 고통, 죽음, 구원, 희망이라는 관념적 내용들을 함축하는 <메두사의 뗏목>을 그린다. 그리고 173년이 흐른 1992년 제프 월은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을 참조해 <죽은 군대는 말한다>를 제작한다.  / 독립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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