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가을이 저만치 있는데, 붉은 악마여, 당신은 계절을 미리 빌려와 한반도 이 땅을 단풍색으로 벌겋게 물들였습니다. 특정 이데올로기 집단이 인류사에 특허(?)를 냈던 금기의 색깔을 다시 찾아와 한반도를 용광로처럼 들끓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꿈꾸어 보지 못했던 「붉은색 기피증(레드 컴플렉스) 탈출」에 당신은 선봉장이 되었습니다. 12번째 선수인 당신네들이 없었던들 높고 높은 월드 컵 4강의 벽을 어찌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우리는 「붉은 악마들」의 열광 앞에 비로소 온 겨레가 하나가 되었습니다. 여, 야도 없고 지역감정도 없고 그 지긋지긋한 학연, 혈연, 지연도 없었습니다. 온통 한반도에는 「오! 필승 코리아」와 「대~한민국」의 함성이 메아리 치고 있습니다.
 붉은 악마여! 그대들은 펄펄 끓는 마그마였습니다. 5천년 동안 분출구를 찾아 헤메다가 드디어 환희의 찬가로, 감동의 눈물바다로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강대국의 틈바구니서 찢기고 갈린, 일그러진 역사에 4강의 신화를 창조해 냈습니다.
 만주벌판을 누비던 광개토대왕, 대륙의 중원 벌까지 진격했던 연개소문이래 이처럼 통쾌하고 가슴 후련한 국민적 카타르시스가 언제 있었습니까.
 그 한(恨)의 역사로 직조한 그물망에 대포알 슈팅이 꽂힐 때 우리는 열광했고 너무 감격한 나머지 서로 부둥켜 안고 참았던 눈물을, 서럽게 서럽게 흘리고 말았습니다.
 너도 울고 나도 울고, 또 대통령도 눈물을 흘리며 요코하마에서의 필승을 외쳤습니다. 4분5열되었던 국론도 이때만큼은 하나였습니다.
 익룡(翼龍), 교룡(蛟龍), 와룡(臥龍), 비룡(飛龍)이 사해(四海)에서 춤을 춥니다. 신문왕의 만파식적(萬波息笛)에 조용히 침묵하며 살아오던 아침의 나라가 갑자기 출렁입니다. 붉은 태양을 향해서, 밝은 달을 향해서 또하나의 둥근 공이 우주선처럼 광속으로 날아갑니다.
 날아오르는 것은 축구 공 뿐만이 아닙니다. 붉은 악마의 함성이, 꽹과리 굿거리 장단이, 배달겨레의 신명바람이 한국의 힘이 되어 선열의 구국 혼이 서린 6월 하늘로 치솟아 오릅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록(Rock) 음악에 맞춰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르고 태극기로 배꼽티도 해 입습니다. 엄숙주의, 격식주의에 사로 잡혔던 애국가와 태극기가 우리 곁으로 다정하게 다가옵니다.
 그전에는 기성세대가 신세대를 향해 국가관이나 애국심이 부족하다고 나무랐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펼쳐지는 젊은이들의 행동과 함성을 보니까 우려할 사항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 눈치 저 눈치를 보며 역사의 사팔뜨기로 살아왔던 기성세대가 배워야 할 점이 너무 많았습니다.
 우리에게 언제 이와 같은 거리축제가 있기나 했었습니까. 기껏해야 명절날 나들이가 고작이고 요식화 된 시군 축제가 전부였습니다. 영국의 에딘버러 축제나 브라질의 삼바축제 같은 범국민적 축제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축제는 많았지만 축제다운 축제는 없었습니다. 단군이래 우리가 이처럼 단합된 것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그 단합된 힘은 엄청난 국가발전의 에너지로 전환되고 있습니다. 벌써 국가의 위상도 높아지고 신인도도 올라가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문명비평가 기 소르망은 「한국의 상품엔 문화적 이미지가 없다」고 지적한바 있는데 이제 그 이미지가 생겼습니다. 누구도 점치지 못했던 4강 신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 기적을 창조한 장본인은 바로 「붉은 악마들」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악마가 돼보고 싶습니다. 악마 같은 사람들이 천사인척 하는 위선적 행동보다 차라리 있는 그대로 「붉은 악마」로 남아 창조의 불을 지피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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