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칼럼] 권택인 법무법인 충청 변호사·법무부교정자문위원

/ 클립아트코리아
/ 클립아트코리아

춘추시대에 송나라라는 꽤 강력한 제후국이 있었다. 특히 통치자가 양공일 때에 가장 융성했다고 한다. 그는 전시에도 "仁義"라고 쓴 깃발을 내걸고 전투에 임했으며, 실제로 전시에도 머리가 희끗희끗한 나이든 적군 병사는 죽이지 말라는 명을 내려 전쟁터에서도 인과 의를 행하였다고 한다. 송양공은 춘추전국 시대의 패자가 되고자 노력했으나 항상 군사력 측면에서 송나라를 압도하던 초나라의 반대로 번번이 무산되었고, 결국 두 나라는 중원의 패권을 놓고 전면전을 벌이게 되었다. 양군대가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할 무렵, 송나라가 먼저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초나라 군대가 강을 건너기 시작하였다. 이에 송양공의 부하가 즉시 이 상황을 이용하여 초군을 공격할 것을 양공에게 건의했다. 그러나 양공은 "군자는 남의 약점을 이용하여 공격하지 않는다. 이는 정당한 싸움이 아니며 비겁한 행위이다."라며 공격을 반대했다. 이어 초군이 도강하여 근처에 진을 치기 시작하였고, 양공의 부하는 다시 초군이 진지를 마련하면서 어수선해진 틈을 확인하고 초군의 방비가 허술한 틈에 공격할 것을 양공에게 건의했으나, 양공은 "군자는 남이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괴롭히지 않는 법이다"라며 초나라 군대에게 전투준비 시간을 주었다.

결국 강을 건너거나 진지를 마련할 때 입게 될 큰 피해를 예상하고 송나라보다 강력한 군대를 동원했던 초나라는 송군에게 대승을 거뒀다. 이에 수많은 송군은 죽임을 당했고, 양공도 이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고 이듬해 이로 인해 사망하였다. 후에 인(仁과 의(義)의 최고의 가치로 여겼던 맹자는 이러한 양공의 자세야말로 진정 어진 이의 표상이라고 추켜세우며 춘추전국 시대의 패권주도에서 멀어져 버린 송양공을 춘추오패에 선정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후세 사람들은 국운이 걸리고 생사를 오가는 전장에서 쓸데없는 예의나 인정을 베풀다가 나라는 망하게 하였다면서 양공을 비웃었는데, 그 후 명분에 집착해 현실에서 큰 잘못을 범하는 것을 비유하여 '송양지인'이라는 고사성어를 인용하곤 한다.

필자는 가끔 상담을 하면서 현대의 송양공들을 만나기도 한다. 한없이 착하기만 하여 가족의 생계를 제쳐놓고 무리한 보증을 선다던가, 자기도 돈을 남에게 빌려서까지 지인에게 빌려주었다가 큰 낭패를 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 분들 대부분은 받아야할 돈을 너무 쉽게 포기하는 경향이 있고, 그런 포기는 결국 자신의 가족의 곤궁을 더욱 부추기게 된다는 점에서 그런 분들의 행위를 인과 의를 행하였다고 마냥 칭찬할 수만은 없어 보인다.

심지어 그런 대책없는 착함은 가족으로부터 버림받는 사유가 되기도 한다. 배우자의 박약한 현실인식에 지쳐 너무 큰 부채가 생겨 더 이상 살지 못하고 필자에게 이혼을 상담해오는 의뢰인이 적지 않다. 의뢰인들은 "사람은 한없이 착한데...."라며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솔직히 그 분들에게 되묻고 싶다. 가장 보살펴야 하는 가족들에게도 과연 착했느냐고. 그리고 남의 눈에 착한 남자로 비춰지거나, 거절할 용기가 없어 가족을 버린 것은 아닌지.

권택인 법무법인 충청 변호사·법무부교정자문위원
권택인 법무법인 충청 변호사·법무부교정자문위원

 

수많은 종교에서도 남을 돕기를 권하고 있고, 특히 불가에서는 남에게 베풀며 살라는 의미에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강조하고 있다. 무주상보시는 '내가' '무엇을' '누구에게 베풀었다.'라는 자만심 없이 온전한 자비심으로 남에게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언뜻 들으면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인생이므로 무욕(無欲)의 삶을 가치 있다 여기는 불가에서는 필자가 상담하는 현대판 송양공들은 법적으로는 이혼의 갈림길에서 살고 있지만 성스러운 불가의 가르침에 부합하였기 때문에 내세에서는 평안을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필자가 상담하는 현대판 송양공의 삶은 종교적으로도 칭찬받기 어려워 보인다. 불가에서 보는 참된 보시는 가난한 이에게는 분!수!에 맞게 나누어주고, 진리의 말로써 마음이 빈곤한 자에게 용기와 올바른 길을 제시하는 것을 의미하지, 결코 자기 가족의 고통을 수반한 도에 넘치는 베풂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에 올 때와 갈 때 빈손임을 알고 헛된 욕망을 버리고 사는 것은 종교적으로 권장할 수도 있겠지만, 대책없는 착함으로 빈손인생을 넘어 마이너스 인생을 사는 것은 종교적으로는 물론이고 법적으로도 매우 위험한 삶의 방식이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