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성범 수필가

/ 클립아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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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때부터인지 나는 메모에 집착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와서는 잠시라도 이 메모를 버리고는 살 수 없는, 실로 한 메모광(狂)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버릇이 차차 심해 감에 따라, 나는 내 기억력까지를 의심할 만큼 뇌수의 일부분을 메모지로 가득 찬 포켓으로 만든 듯한 느낌이 든다. 나는 수첩도, 일정한 메모 용지(用紙)도 잘 사용하지 않는다. 아무 종이거나-원고지도 좋고, 공책의 여백도 가릴 바 아니다. 닥치는 대로 메모가 되어, 안팎으로, 상하 종횡(上下縱橫)으로 쓰고 지워서, 일변 닳고 해지는 동안에 정리를 당하고 마는지라, 만일 수첩을 메모지와 겸용한다면, 한 달이 못 가서 잉크투성이로 변할 것이다.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을 때, 흔히 내 머리에 떠오르는 즉흥적인 시문(時文), 밝은 날에 실천하고 싶은 이상안(理想案)의 가지가지, 나는 이런 것들을 망각의 세계로 놓치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내 머리맡에는 원고지와 연필이 상비(常備)되어 있어, 간단한 것이면 어둠 속에서도 능히 적어 둘 수가 있다. (중략).. 또, 수집벽(蒐集癖)도 약간 있어, 내 원고를 발표한 신문, 잡지 들은 물론 하나도 빠짐없이 스크랩하고, 소용(所用)에 닿을 만한 다른 신문, 잡지도 가위와 송곳을 요한 후, 벽장 속에 쌓아 두는 것이다. 요컨대, 내 메모는 내 물심 양면(物心兩面)의 전진하는 발자취며, 소멸해 가는 전 생애의 설계도(設計圖)이다"

이 글은 오래전에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린 이하윤(異河潤) 님의 <메모광> 이라는 제목의 수필이다. 학교에서 수업을 할 때는 그리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없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 다시 이글을 읽어보니 정말 가슴에 와 닿는 부분이 너무나 많다. 누구나 젊었을 때에는 한번 들으면 좀처럼 잊어버리지 않고 생각도 잘 나서 '참, 그 사람, 총기가 좋아, 어쩌면 그 많은 것을 다 잘 기억하고 있나. 그려'하며 다른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사기도 했지만 세월 앞에 장사가 없다는 말처럼 날이 갈수록 기억력이 쇠퇴해 감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얼마전부터는 통화할때는 반드시 옆에 작은 메모지를 준비해 놓는다. 불현듯 뇌리를 스친다. 몇년전까지 현직에 있었을때 내가 존경하고 잘 아는 지인께서는 아예 양복 안주머니에 조그마한 수첩을 가지고 다니셨다. 그래서 그분은 수시로 작고 큰일을 깨알처럼 메모하셨다. 그리고 그 메모를 집에 돌아가셔서 다시 보시고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하시며 정리하셔서 자신의 삶의 양식으로 삼으시는 것을 옆에서 본 적이 있다. 이제야 메모의 소중함을 깨달아 나 또한 주머니에 반드시 메모지를 준비하고 다닌다. 물론 휴대폰에 메모하는 란이 있어 기록도 하고 월별 달력이 있어 매일, 주간의 행사를 입력은 하지만 메모지는 또한 메모지 대로 용도가 있는 것 같다. 설령, 아름다운 자연을 볼때면 살며시 주머니에 있는 메모지를 꺼내 동심으로 돌아가 시상(詩想)을 담아보기도 하고 글의 개요를 짜보기도 한다. 마음놓고 넋두리가 담긴 힐링 낙서장을 만들어 볼수가 있어 참 메모지는 요긴하게 쓰여진다.

이성범 수필가
이성범 수필가

메모는 분명 우리 삶의 필수품이다. 작게는 인간관계의 첫걸음인 약속을 지키는데 등불이 되어주기도 하며 일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데도 많은 도움을 주기도 하며 메마른 마음에 풍요로운 정감을 주기도 한다. 아니 요즘처럼 많은 사람들이 스트레스로 어려워하는 정신건강에도 나름대로 작은 일익을 담당하기도 한다. 이렇게 메모는 우리 삶의 윤활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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