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이난영 수필가

/ 클립아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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뜰 안에 곱게 핀 아름다운 꽃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정신 줄을 놓을 때가 많다. 오늘도 색색의 백합 향기에 취해 약속 시각도 잊을 뻔했다. 40분 정도면 충분히 가겠지. 안도의 숨을 쉬며 차를 기다려도 택시는 물론 시내버스도 없다. 조급한 마음에 늦어진다는 문자메시지를 넣고 버스와 택시를 갈아탔는데도 20여 분 늦었다.

머리를 조아리며 들어가니 열흘 전에 군산 일대로 문학기행을 다녀왔기 때문인가. 문학기행 이야기부터 문학에 관한 이야기로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참 아름다운 인연이고 만남이란 생각에 미소 지어진다.

품격 있는 밥상에 고운 멜로디의 하모니카 연주까지. 오랫동안 만나온 문우들이나 이렇게 화기애애한 시간은 처음인 것 같아 헤어지기 섭섭했다. 20여 분이나 늦은 벌칙으로 2차를 쏜다고 하니, 청주시가 주최한 생명글판 공모전에서 장원한 문우가 책임진단다. 모두 카페로 이동하여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정담을 나누다 멀리 진천까지 가야 하는 문우가 있어 아쉬움을 뒤로 하고 일어섰다.

멀리 가는 문우부터 하나둘 배웅하고, 마지막으로 일행의 차를 타려는 순간 전화벨이 울린다. 별생각 없이 받는데 '나 죽을 것 같아!' 하는 모깃소리보다도 작은 남편의 목소리가 들린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잖아도 70의 나이에 인생 3막을 시작해 마음이 놓이지 않았었다. 남편은 인생 1막을 국영기업체에 근무하다 명예롭게 정년퇴직하고, 1년 동안 어머니 병시중을 하며 갖은 효도를 다 한 성실한 사람이다. 어머니 하늘나라로 보내드리고 인생 2막을 시작해 10년 동안 서울에 있는 감리회사에 다녔었다. 전문직종인 만큼 더 해도 되나, 70세 되던 지난해 아름다운 용퇴를 종용했더니 마지못해 사표를 내고 집으로 왔다.

일 년 동안 농사도 지으며, 꽃도 기르고 정원도 가꾸는 등 하루하루 분주하게 보냈다. 그래 내 딴에는 먼저 퇴직한 내가 터를 잘 잡아 남편도 보람되고 유익하게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나 보다.

올봄, 지난해 수해 입은 주차장 보수와 정원 정리가 어느 정도 끝이 나자 다시 취직하고 싶단다. 기가 막혀 '당신같이 나이 많은 사람을 누가 받아 주느냐'고 하니, 받아주는 데 있으면 가도 되느냐고 되묻는다. 허허실실로 그렇다고 했다. 젊은이처럼 인터넷으로 구인광고를 찾아보고 이력서를 쓰는 등 동분서주한다. 집안일을 할 때는 어딘가 모르게 서툴러 보였는데 나이에 맞지 않게 패기 찬 모습이 미더웠다.

합격자 발표 날, 미련 없이 부부동반 모임이나 가자며 동해안으로 향했다. 대관령을 막 넘는데 기다리던 전화가 왔다. 일행이 있어 기쁜 내색도 못 하고, 우물쭈물 전화를 끊는 남편의 표정이 밝다 못해 빛이 난다.

첫 출근을 하는 날, 상기된 표정으로 집을 나서는 뒷모습이 참으로 당당해 보였다. 그렇게 좋으냐고 하니 씽긋 웃음으로 얼버무린다. 그러면서 지금이야 출퇴근하지만, 안정되면 숙소에 있을 수도 있으니 그리 알란다.

그렇게 희망에 부풀어 인생 3막을 시작했다. 업무파악은 물론 새로 공사 시작하는 현장인 만큼 사무실도 꾸며야 하고, 각종 민원 처리 등 밤낮으로 뛰어다녀 안쓰럽기는 하나 집에 있을 때보다 생기로워 보이니 다행이다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파 죽을 것 같다고 연락이 온 것이다. 남편은 체신은 다소 왜소한 편이나 결혼한 지 40년이 넘었지만, 감기도 몇 번 앓아본 적이 없을 정도로 건강했다. 그런 사람이 아파 죽을 것 같다고 하니 머릿속이 하얘졌다. 좋은 기분 망칠까 보아 일행들 눈치 못 채게 조심하려 하나 초조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아들에게 약을 사서 가보자고 전화를 하니, '엄마! 보은까지 가는 시간이 얼만데 무조건 가느냐'고 하며, 아빠의 상태를 파악하고 대처하겠단다. 믿음직한 아들의 말에 조금 진정되었다.

어둠 속을 딸과 함께 보은으로 가는데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지난해 남편 절친 두 분이 갑자기 유명을 달리하였기 때문인가.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도 보이지 않고, 입만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미원을 막 지나는데 야간당직병원에서 응급조치 하고 조금 나아졌으니 밤 운전하지 말고 되돌아가라는 전화가 왔다. 그래도 병원으로 달려갔더니 약간 초췌해졌으나 생각보다 괜찮아 안도했다.

이난영 수필가
이난영 수필가

같이 청주로 오면 좋으련만 다음날 바쁘다며 숙소로 간단다. 돌아오며 생각하니 별일 없이 지나가는 오늘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만약, 약을 사 간다고 우왕좌왕 시간만 끌었더라면.

다음날 한국병원에서 몇 가지 검사한 결과 과도한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로 몸에 이상 반응이 일어난 거란다. 며칠 안정을 해야 한다기에 하루라도 쉬라고 했더니, 안 된다며 되돌아가는 남편이 듬직하면서도 애잔하다.

꽃에 한눈팔지 말고 열매를 볼 줄 알아야 한다는 '처기실 불거기화(處其實 不居其華)'란 말이 있다. 인생 1막과 2막을 크고 화려하지는 않았어도 열매를 잘 맺지 않았나 싶다. 인생 3막도 산과 들에 아기자기하게 핀 들꽃처럼 아름다운 열매 맺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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