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의 최고 가게] 5. Since 1957 '괴산인쇄소'
故 양규원·춘호·일환 3부자, 62년째 운영
수작업~기계화~디지털화과정 모두 겪어

3대에 걸쳐 운영하는 '괴산인쇄소' 양춘호(왼쪽) 2대 사장과 아들 일환 3대 사장이 가게 앞에서 손을 맞잡고 웃고 있다. 1957년에 '괴산인쇄소'를 시작한 1대 사장인 양규원 옹은 99세이던 2015년에 작고했다. / 김용수

[중부매일 김미정 기자] "우리 아버님은 자랑하고 싶어요. 괴산지역발전에 큰 역할을 한 '어른'이라고 생각해요."

괴산에서 가장 오래 된 인쇄소인 '괴산인쇄소'(괴산읍 읍내로2길)는 3대가 운영하고 있다. 2대 사장인 양춘호(69) 사장은 선친얘기가 나오자 눈가가 촉촉해졌다. 선친이 어떻게 가게를 이끌어오셨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약속날짜를 한번도 어긴 적이 없으셨어요. 수작업이다 보니 시간을 당길 방법이 없는데도 밤을 지새우면서도 약속시간을 꼭 지키셨어요. 새끼(자식)가 놀고 있어도 시키지 않고 손수 하셨어요. 힘들어도 "힘들다"고 얘기한 적이 없으셨어요."

'괴산인쇄소는 신용 하나는 틀림없다'는 평판 덕에 62년째 운영될 수 있었다고 양춘호 사장은 평했다.

"지역에 인쇄소가 없었다면 당시 회의서류를 어떻게 만들었을까 싶어요. 괴산군청 자료집, 괴산군의회 회의록, 의정보고서 등 각종 회의서류를 시간 맞춰서 갖다줬어요. 지방의회 태동하면서부터 같이 일했죠."

괴산에 인쇄소가 3곳 있었으나 디지털화되면서 '괴산인쇄소'만이 유일하게 남아있다. 수작업 시절부터 기계화, 디지털화과정을 모두 겪었다는 얘기다.

"옛날에는 총알을 갈아서 철필을 만든뒤 등사원지에다 글을 쓰고 등사기에 원지를 인두로 다려서 붙인뒤 손으로 등사기를 통해 찍어냈었죠."

등사원지 한장에 철필로 글씨를 쓰는 데에는 1시간쯤 걸린다. 수작업시절의 얘기가 이어졌다.

"지금은 제본소가 있지만, 옛날에는 재단기가 없으니까 재단칼을 갈아서 송판에 깔아놓고 좌대로 종이를 눌러가면서 손으로 잘랐어요."
 

괴산인쇄소 양춘호 2대 사장이 30여년간 사용해온 재단기로 재단작업을 하고 있다. / 김용수

이후 여유가 생겨 활자로 인쇄를 할 수 있는 활판기를 구입했고, 동력도 없는 활판기를 발로 밟아가면서 작업을 했단다. 이후 청타기, 탁상용 마스터 인쇄기 등이 등장하면서 인쇄업에 큰 변화가 왔다고 설명했다.

"활판은 석유기름으로 닦아내는데 한겨울에도 맨손으로 기름을 닦아냈어요. 활판기를 발로 밟아가면서 종이를 집어넣는 걸 '삽질'이라고 하는데 그 시절에는 그렇게 인쇄를 했죠. 신문사는 문선공, 조판공, 활자공이 따로 있지만 우리는 다 해야 했어요."

아버지 故 양규원씨는 평안북도 출신으로 6·25전쟁 당시 피난 오면서 괴산에 정착했다. 60년대 중반부터 30년간 괴산고등학교, 괴산중학교 문집을 직접 글씨를 써서 완성해 인쇄까지 맡기도 했다.

"아버님은 이북에서 철도청에 근무했었어요. 글씨를 잘 쓰셔서 필경으로 책을 만드셨어요. 99세여도 허리 굽은 모습이 아니었어요."

2015년 99세 '백수'에 눈을 감은 선친은 70세까지 가게일을 보셨단다. 괴산인쇄소의 첫 시작은 57년 괴산읍 동부리 역말 다리 옆(지금의 '나무전 거리')에서였다. 10여평 가게에서 10년간 운영하다가 67년부터 6평 짜리 자택 창고에서 23년을 이어갔다. 양춘호 사장이 마흔이던 90년, 40평 면적의 가게를 얻어 규모를 키웠고, 6년 전 지금의 자리로 세번째 이사를 했다.

"이사하면서 옛 기계들, 옛 자료들을 다 버렸는데 후회가 돼요. 괴산의 역사자료가 됐을텐데"
 

선친 양규원 옹(1대 사장)을 도와 14살 때 인쇄업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양춘호 2대 사장이 발로 밟아가면서 활판기 작업을 했던 옛 시절을 설명하고 있다. / 김용수

그는 14살때부터 아버지 밑에서 인쇄일을 익혔다. 

"우리 형제가 8남매인데 다섯째에요. 8남매 중 공부를 제일 못해서 아버님 돕는다고 고등학교 졸업하고 사회활동을 많이 했지요."

순탄하기만 했던 건 아니다. 90년대, 사업을 위해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다가 십수년째 이자 갚느라 고생하기도 했고, 지인의 보증을 잘못 서 재산을 잃기도 했다. 하지만 실패를 겪으면서 욕심내지 않는 삶을 배웠다. 양춘호 사장은 88년 괴산JC 회장, 88서울올림픽 성화봉송주자, 괴산새마을회장 등을 맡기도 했다.

3대 사장인 양일환(40) 사장이 가게에 손을 보탠 지는 꼭 10년이 됐다. 직장생활을 3년간 하다가 2006년 결혼하고 2008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의 나이 서른이었다.

"처음에는 인쇄업을 할 생각이 없었어요. 하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삶을 이어받는다는 느낌이랄까요. 가게를 오랫동안 해오셨고, 지역에서 자리를 잡았고. 인쇄업이 기록적인 측면에서 보면 적지 않은 부분이니까 사명감 같은 게 있었어요."(양일환)
 

양일환 3대 사장이 인쇄물 편집디자인 작업을 하고 있다. 그는 핸드메이드 인쇄물로 차별화방안을 구상중이다./ 김용수

그는 할아버지·아버지에게는 없는 '컴퓨터기술'을 바탕으로 핸드메이드를 통한 차별화를 욕심내고 있다.

"인터넷이 대중화돼있어서 조금만 검색하면 저렴하게, 디자인도 다양하게 할 수 있거든요. 저희는 인쇄물을 공장에서 찍어내는 게 아니라 개인앨범 제작처럼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컨셉으로 특화해보고 싶어요."(양일환)

손글씨인 캘리그라피도 배워보고 싶단다. 괴산인쇄소의 62년 과거, 하지만 '미래'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워했다.

"로봇이 신발사이즈를 재서 재단해서 만들어내는 시대니까 10년, 20년 후에 가게가 어떻게 될 지는 예상하기가 어렵네요. 업종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고요. 하지만 종이 라는 기록물이 사라지지는 않을테니 시대변화에 계속 맞춰가야겠죠."(양일환)
 

3대에 걸쳐 운영하는 '괴산인쇄소' 양춘호(2대) 사장과 아들 일환(3대)씨가 편집디자인 작업 중인 시안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 김용수

이들 부자에게 괴산인쇄소는 보금자리이자 울타리의 의미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하셨던 보금자리를 이어받은 거니까 제게는 괴산인쇄소가 '울타리' 같은 느낌입니다."(양일환)

"보배이고, 보석 같은 곳입니다. 살아갈 수 있게 해줬으니까."(양춘호)

피할 수 없는 시대변화 속에서 양춘호·일환 부자는 인쇄소를 지키면서, 고향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고, 살아가고 싶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