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훈의 소설 「광장」은 60년대를 대표할만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주인공 이명준은 광장과 밀실사이에서 고뇌한다. 남쪽에는 밀실은 있으나 광장이 없고 북쪽에는 광장은 있으나 밀실이 없다. 제3국행을 택한 이명준은 영원한 광장과 자기만의 밀실을 찾아 푸른 파도에 몸을 던진다.
 광장이란 단순히 빈터나 넓은 곳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광장은 건축물의 연장선상에서 해석되는 공간이다. 따라서 무심천 둔치는 광장이 될 수 없다. 여의도는 국회의사당 등이 있기 때문에 간신히 광장의 의미를 획득할 수 있으나 이 역시 산업화, 도시화 과정의 소산이지 애초부터 광장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서구의 문화는 광장의 문화를 축으로 한다. 콩코드 광장, 베드로 광장, 산 마르코 광장, 워싱톤 광장 등 수많은 광장이 있다. 여러 건물들로 에워싸인 광장은 사람들이 그냥 모여드는 공간이 아니라 그곳에 머물며 대화를 하고 콘서트를 열고 때로는 운동경기도 하는 삶의 중요한 공간이다.
 우리나라는 광장의 문화가 아니다. 끼리끼리의 공동체 문화는 그렇게 큰 광장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회갑 잔칫날, 수십명이 모여들면 꽉 차는 앞 마당과 전을 부치는 뒷 마당 서너 평이면 족했다. 서구의 광장이 외형적이라면 우리의 마당은 안으로 잦아들며 친밀도를 자꾸 확인하는 내면의 공간이었다.
 생활의 패러다임이 서구화하면서 마당은 없어지고 그 대신 광장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서구와 같은 형태의 광장은 아닐지라도 학교운동장, 체육관앞 광장, 여의도 광장, 광화문 광장 등 우리 식의 광장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광장이 생겨나면서 개개인의 밀실이 없어진다면 그건 더 큰 불행이다. 광장이 열린 장소라면 밀실은 그 반대로 나만의 공간이다. 물고기도 돌틈사이로 몸을 숨기는 판인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어찌 자기만의 공간을 마다하겠는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은 본능적으로 자기 몸을 숨기고 싶어한다.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되 일정한 거리, 즉 자기만의 공간을 확보하고 싶어한다. 사람들은 늘 밀실과 광장사이를 오간다. 자기만의 문을 여는가 하면 어느새 닫고 만다. 광장과 밀실은 이처럼 길항작용을 계속한다.
 광장과 밀실의 기능은 정보화 사회로 진입하면서 제 몫을 잃거나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물리적 광장대신 사이버 광장을 선호하고 있으며 밀실은 도청(盜廳)과 몰래카메라, 투시카메라 등으로 그 공간과 프라이버시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어느새 온 라인의 문화는 오프 라인의 문화를 밀어내고 생활의 중심축으로 자리잡고 있다. 온 라인이 여러면에서 편리한 것은 사실이나 그 대신 사이버 테러, 해킹, 컴퓨터 바이러스 등에 시달리고 또 자기만의 밀실도 침투당하고 있다.
 이 모두가 과학문명이 만들어낸 득과 실이니 누구를 원망할 처지도 못된다. 광장에서의 자유못지않게 밀실에서의 자유도 중요하다. 그러나 몰카는 심심찮게 사생활을 침해하고 심지어는 화장실에 까지 출몰하고 있으니 부끄러운 행동, 일거수 일투족을 공개해야 하는 판이다.
 아무리 생활양상이 온 라인으로 바뀌어 가고 있으나 오프 라인도 엄연히 존재한다. 온 라인과 오프 라인 문화가 공존하고 상생을 도모할때 삶의 질은 한단계 업그레이드 될 것이다. 점점 좁아지는 광장과 밀실이다. 새해엔 침해당한 그런 공간들을 마음속에서라도 넓게 그려봐야 겠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