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꽃을 버려야
나무는 꽃을 버려야
  • 중부매일
  • 승인 2018.07.26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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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최시선 수필가
/ 클립아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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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살구나무 거리를 거닌다. 지난 밤 강풍에 떨어진 살구가 즐비하다. 노랗게 익은 살구가 바람을 이기기 못하고 그냥 낙하한 것이다. 깨진 것도 있고 터진 것도 있다. 봄부터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 드디어 열매를 맺더니, 이제는 모든 것을 떨구기 시작한다. 이른바 '놓아 버리기'이다.

사람이 살면서 이 '놓아 버리기' 만큼 어려운 것이 없다. 이제는 놓아버려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어떤 이는 이를 '방하착(放下着)'이라고 한다. 꼭 붙들고 있는 것을 아래로 놓아 버린다는 뜻이다. 노력하고 애써서 얻은 것은 참 소중하다. 그러기에 애정이 생기고 늘 간직하고 싶어진다. 그 소중한 것을 소유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본다면 괜찮다. 거기엔 집착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끈끈이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집착하는 마음이다.

집착은 아주 고약한 놈이다. 마음속을 온종일 휘젓고 돌아다니면서 찌르기도 하고, 잠시 어디에 숨었다가 불현듯 나타나기도 한다. 그래서 사랑하지도 말고 미워하지도 말라고 했나보다. 사랑하면 만나지 못해 괴롭고, 미워하면 만나서 괴롭다. 마음속에 그놈이 늘 꽈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문구 중에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을 수 있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책을 읽다가 이 말을 발견하고 희열에 찬 적이 있다. 너무도 마음에 들어 책상에 붙여 놓고 이를 외우는데 한 달은 걸린 것 같다. 요즘은 학창시절만큼 잘 외워지지 않는다. 그래도 외운 것은 이 말이 뭔가 내 삶의 지침이 될 것 같아서였다. 살아가면서 집착을 줄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집착 없는 삶, 이것은 더할 나위 없는 행복한 삶이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이 말은 진리다. 만일 나무가 자신이 피운 꽃이 아름답다고 하여 그냥 매달고 있다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나무는 일고의 돌아봄도 없이 때가 되면 꽃을 버린다. 바람에 날리기도 하고 스스로 떨구기도 한다. 어디 나무뿐인가. 세상의 온갖 풀이며, 곡식이 다 그러하다.

꽃을 피우지 않는 생명은 없다. 언젠가 놀란 적이 있다. 내가 기거하는 관사에 고구마를 몇 고랑 심었는데 어느 날 우두커니 고구마 넝쿨을 바라보다가 한 송이 꽃을 발견했다. 꼭 나팔꽃처럼 생겨서 넝쿨을 이리저리 젖혀보았다. 나팔꽃은 아니었다. 분명 고구마 줄기에서 뻗어 나왔다. 아, 고구마도 꽃을 피우는구나. 그렇지. 내가 보지 못했을 뿐이지. 고구마는 제 살을 땅으로 내리기 위해 하늘을 향해 몸짓을 하고 있었다. 순간 경탄하여 숨이 멎을 정도였다.

강물을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를 수 있다. 물은 시작이 있다. 땅속에서 솟아오를 수도 있고, 깊은 골짜기에서 흘러나올 수도 있다. 이 물은 도랑으로, 냇가로 흘러 강을 이룬다. 조그만 물줄기들이 모여서 드디어 강물이 된다. 강물은 유유히 흘러간다. 목적지는 바다다. 강물이 흘러가다가 만일 산을 만나 쉬어 버리면 끝내 바다에 이를 수 없다. 돌아서라도 가야 한다. 아무리 오래 머물렀던 강이라도 강물은 가차 없이 그 강을 버려야 한다. 그래야 넓은 바다를 만날 수 있다.

얼마 전 러시아 월드컵에서 우리 조는 부진을 면치 못했다. 스웨덴, 멕시코에 내리 졌다. 이제는 강적 독일전만 남겨 놓고 있었다. 누가 알았겠는가. 전차군단 독일을 우리가 이길 줄이야. 이건 정말 대박이다. 아마도 거의 승리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후반에 연속 골을 넣는 장면을 나는 두고두고 보면서 곱씹어 보았다. 한국인의 투혼일까, 아니면 독일이 못해서일까.

나는 가만히 선수들의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분명, 투혼도 있었겠지만 우리 선수들은 꽃을 버리고 강을 버렸기에 가능했다. 스웨덴과 멕시코에 졌다는 그 지난 생각을 이미 다 버리고 잊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임했다. 만일 진 마음에 머물러 있었다면 독일과는 상대도 못했을 것이다. 버렸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다. 지나온 길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향했기에 승리할 수 있었다.

고사에 '백척간두에서 진일보 하라'는 말이 있다. 백자나 되는 높은 장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어떻게 되겠는가. 떨어져 죽을 것은 뻔한 일이다. 그런데 죽지 않는다. 다시 크게 살아난다. 두려움을 무릅쓰고 목숨을 걸 때에 살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축구도 그랬다.

나무에서 떨어진 살구가 이리저리 차인다. 봄에 꽃을 버리고 이제는 열매도 버린다. 이 또한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경지가 아닌가. 강물이 강을 버려 바다에 이른 모습이 아닌가.

나무는 열매를 버려 더 크게 산다. 아, 내 삶 또한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데 그저 막막할 따름이다.
 

최시선 수필가.

약력
▶2006년 월간 문예사조 수필 등단
▶CJB 청주방송 제5회 TV백일장 수필 장원
▶한국문인협회, 충북수필문학회 회원, 청주문인협회 부회장
▶저서 '청소년을 위한 명상 이야기', '학교로 간 붓다', '소똥 줍는 아이들', 수필집 '삶을 일깨우는 풍경소리', '내가 묻고 붓다가 답하다'
▶진천 광혜원고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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