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세상의 생명체는 모두 부모를 갖고 있다. 어미 아비 없는 자식은 하나도 없다. 부모가 훌륭했기 때문에 자식이 훌륭한 경우도 많다. 그 아비에 그 아들이다. 이율곡이 뛰어난 것은 신사임당이 있었기 때문이며 한석봉의 경우도 그러하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도 이 논리와 마찬가지다. 흥덕사가 어미라면 직지는 거기서 태어난, 빼어난 자식이다. 직지와 흥덕사는 이처럼 모자관계에 있고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관계에 있다.
 그런데 세간의 이목은 거의 자식인 직지에게만 쏠린다. 직지오페라가 나오고 직지 상품이 나오고 관련 세미나도 직지에 편중되어 열리고 있다. 재작년에는 직지가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직지의 날도 제정되었다. 어미야 자식 잘되면 그만이지만 그래도 쓸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무슨 의붓 어미도 아닌데 말이다.
 운천동에 위치한 흥덕사지가 만약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직지의 위상이 이처럼 높아졌을까 반문해 본다. 직지의 자리매김에 결정적 역할을 한 흥덕사지엔 적막감이 감돈다. 금당(金堂)을 비롯하여 동·서회랑지를 정비하고 석탑 1기를 배치해 놓았으나 인쇄문화의 메카에 걸맞는 가람의 모습이 아니다.
 동쪽 회랑 한편으로는 주인 잃은 연화좌대가 을씨년스럽게 사열을 하고 있다. 금당은 예불을 하는 법당으로서 구색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용마루 봉황이 단청빛 기둥을 박차고 오르는 생기있는 법당이 아니라 향불도 사르지 않는 컴컴한 법당에서 고려시대 철불이 졸고 있다.
 법당 앞 석탑 1기는 고려시대의 맛을 전혀 내지 못하고 있다. 택지개발 공사로 반쪽 절터가 된 가람인데 그나마도 초라하여 직지를 인쇄한 곳이라고 선뜻 믿기지 않을 정도다. 사적지 관리 마인드가 고인쇄박물관과 직지에 편중되어 있기 때문에 정작 직지를 찍어낸 곳에는 방문객도 많지 않다. 흥덕사지는 그야말로 죽어있는 절터다.
 직지의 모태가 되는 흥덕사지를 복원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해지면서 청주시도 이에대한 프로젝트를 마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발굴조사를 끝낸 상태이므로 복원에 관한 기술상의 문제는 별로 없을듯 하다. 다만 절의 성격, 종파 등은 좀 더 연구해볼 과제로 남아 있으나 직지가 선(禪)의 요체를 뽑은 것이기 때문에 선종계열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사찰을 복원함에 있어 종파를 굳이 따질 필요가 없다. 오히려 종파를 따질 경우엔 분란의 소지만 더 있게 마련이다. 불교의 모든 교파가 이를 초월하는 범불교적 정신이 필요하고 또 불교계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빛나는 전통유산을 되살린다는 차원에서 이런 저런 이해관계를 극복하는 추진위원회의 구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추진위가 구성된 연후 시민의 폭넓은 공감대를 얻고 절터복원에 대한 문화재청의 허가를 얻는 것이 흥덕사지 복원의 수순이다. 사적관리의 원칙은 현장의 복원보다 보존에 있으므로 허가를 얻어내는 것도 쉬운 문제는 아니다. 복원에 있어 청주시의 의지와 예산확보가 있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리하여 청주엘 가면 직지가 있고(원본은 프랑스에 있지만) 직지를 찍어내던 흥덕사가 있다는 점을 관광객에게 알려야 한다. 직지를 찍어내던 과정을 흥덕사지에서 재현한다면 좋은 문화상품이 되리라 생각된다. 앞으로의 문화재관리는 화석적인 전시 일변도가 아니라 현대인의 가슴에 생생하게 다가서는, 살아있는 유적관리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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