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의 최고 가게] 6. Since 1967 '진천구두병원'
'신발 고치는 의사' 원광수 사장 13살때 구두 걷어오는 '찍새'로 첫 시작
10년전 수제화 작업 단골에 인기…"80세까지 수선공 하고 싶어"

'진천구두병원'을 운영하는 원광수 사장(64)은 13세부터 구두닦이 '찍세' 심부름으로 시작해 52년간 진천읍내 토박이 구두수선공으로 살아왔다. '신발을 고치는 의사'라 자칭하는 원 사장은 가장으로서 생계를 책임지며 살아온 삶의 장인이자 구두수선의 장인이다. / 김용수
'진천구두병원'을 운영하는 원광수 사장(64)은 13세부터 구두닦이 '찍세' 심부름으로 시작해 52년간 진천읍내 토박이 구두수선공으로 살아왔다. '신발을 고치는 의사'라 자칭하는 원 사장은 가장으로서 생계를 책임지며 살아온 삶의 장인이자 구두수선의 장인이다. / 김용수

[중부매일 김미정 기자] "병원에 의사가 있듯이, 나는 신발을 고치니까 '의사'죠. 좋은 신발이건, 헌 신발이건 새 신발마냥 고쳐주지."

진천군 진천읍 읍내리에 위치한 '진천구두병원' 원광수(64) 사장은 자신을 "의사"라고 소개하면서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사람들의 삶의 고단함이 담겨있는 신발을 그의 손으로 고쳐주고 또 반짝반짝 광을 내준다.

2평의 작은 가게에는 낡은 선풍기 2대가 돌아가고 있었다. 아침 8시에 나와 저녁 8시까지 일하는 그는 선풍기 2대로 한여름을 나고 있다.

"우린 에어컨이 없어서…, 더워서 어떡하죠?"

겨울에는 난로 2대로 추위를 버틴단다. 가게 안에는 수선미싱 하나, 창·굽을 갈 때 쓰는 기계 하나, TV, 시계, 달력, 선풍기 2대가 전부다. 그리고 수선을 기다리거나 마친 신발 수십켤레가 사방에 놓여있다.

"구두의 생명은 '광'이죠. 시내에서는 불로 (구두)광을 내는데 광은 더 나지만 구두 수명이 안좋아요. 저는 물로 광을 내요. 침으로 하면 광이 더 나지만 사람들이 안 좋아하니까."

요즘은 하루에 구두닦이 10켤레, 수선 7~8개, 뒷굽 교환 몇 개를 한다고 했다. 봄, 가을에는 일감이 더 많다고 했다.

원광수 사장이 지난 세월이 묻어나는 거친 손으로 구두를 닦고 있다. 원 사장이 운영하는 '진천구두병원'은 2평 규모의 작은 가게이지만 그의 지난 세월이 담긴 삶의 터전이다. / 김용수
원광수 사장이 지난 세월이 묻어나는 거친 손으로 구두를 닦고 있다. 원 사장이 운영하는 '진천구두병원'은 2평 규모의 작은 가게이지만 그의 지난 세월이 담긴 삶의 터전이다. / 김용수

작업의자에 앉으면 눈앞에 충북도지사 표창패, 시(詩)를 적어 코팅해놓은 흰 A4 용지가 눈에 들어온다. 그에게 힘을 불어넣어주는 '응원메시지'들이다. 2011년 충북도 '자랑스러운 직업인'에 선정돼 받은 표창패, 초등학교 동창이자 국어교사인 이종대 씨가 원 사장을 위해 직접 시를 지어 선물한 '구두병원'이라는 제목의 시다.

"초등학교 다닐 때에는 상장을 한번도 못 받았는데 사회생활하면서 표창 받으니까 기분 좋지요. 72~73년께 청소년일 때 도지사표창을 한번 받았었어요. 구두통 메고 아이스께끼 장사하면서 열심히 산다고…."

이후 자율방범대 활동 20년 유공으로 경찰서장 표창도 몇 차례 받았다. 그의 별명은 '카투리'. 이유가 있다.

"초등학교 때 최영백 교육장님이(당시 진천교육장) 지어준 별명이에요. 여름에는 아이스께끼통 메고 다니고, 겨울에는 구두통 메고 다닌다고, 항상 부지런하고 빠릿빠릿하다고 '카투리'라고 지어주셨어요."

그가 구두수선일을 시작한 것은 1968년 13살이었다. 진천터미널 주차장 한켠에 작은 부스를 만들어 여러명이 함께 일했다.

"여름에는 아이스께끼 장사를 했고, 찬바람 불면 구두통 메고 면사무소, 관공서를 돌아다녔어요. 초등학교 때 기성회비를 못 내니까 진천터미널에서 형들 밑에서 (구두닦이) 일을 배웠죠."

당시 그의 역할은 신발을 걷어오고 다시 갖다주는 심부름꾼이었다.

"초등학교 때에는 '찍새'였어요. 신발 걷어오는 사람!"

원광수 사장이 고객이 맡긴 구두 밑창을 수선하고 있다. '신발 고치는 의사'라 자칭하는 그의 손을 거치면 웬만한 것을 새것처럼 수선이 된다. / 김용수
원광수 사장이 고객이 맡긴 구두 밑창을 수선하고 있다. '신발 고치는 의사'라 자칭하는 그의 손을 거치면 웬만한 것을 새것처럼 수선이 된다. / 김용수

이후 함께 일했던 형들이 하나둘 구두점을 떠나면서 원 사장이 이어받았다. 진천터미널 구두점에서만 30년 넘게 일했고, 이후 남동생에게 물려줬다. 20년 전에는 직원 4~5명을 두고 일하기도 했단다. 진천터미널이 1999년 읍내리에서 벽암리로 이전하면서 원 사장도 그 맞은편인 지금의 자리로 이사를 왔다. 지금 자리에서만 20년째다.

"터미널 구두박스(구두점)은 동생이 하다가 그만뒀어요. 지금은 진천에 구두점이 2곳 남았어요."

52년째 일하면서 별별 일, 별별 손님도 만났다.

"진천터미널 2층에 예식장이 있었는데 한 손님이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고 간 거에요. 신발이 메이커(브랜드)여서 신발값 12만원을 물어준 적이 있어요. 20년 전이었는데 큰 돈이었죠."

당시 12만원은 5일간 꼬박 일해야 버는 돈이었다며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속상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떤 분은 2년 지나서 (신발을) 찾아가기도 하고, 찾아가고도 안 찾아갔다고 하기도 해요. 지금은 '보름 이상 신발을 안 찾아가면 책임지지 않는다'고 써놓았어요."

자부심을 가졌던 적은 10년 전, 수제화를 만들 당시를 꼽았다. 단골들이 천안, 서울 등서 찾아왔고 택배 물량도 많았었다고 기분좋은 과거를 꺼냈다.

"시골에는 발 볼이 넓은 사람들이 많아요. 발에 딱 맞게 사이즈를 재서 손님들이 편하게 신고 다니게 해줬어요."

원광수 사장이 지난 세월이 묻어나는 거친 손으로 구두를 닦고 있다. / 김용수
원광수 사장이 지난 세월이 묻어나는 거친 손으로 구두를 닦고 있다. / 김용수

수제화 작업은 10년 전 시작해 7년간 이어오다가 3년 전 손을 뗐다. 수제화 한 켤레를 만들어 손에 쥐는 돈은 고작 7만~8만원이었다.

"한 켤레를 만드는데 세 명이 필요해요. 신발창 만들어 본드작업하는 사람, 가피작업 하는 사람, 꿰매는 사람. 지금은 타산이 안 맞아서 그만뒀어요."

진천 토박이인 원 사장은 요즘은 돈벌이보다는 사람들 만나는 재미에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돈은 없어도 벗들이 많아요. 더 바랄 게 없어요. 지나가다가 지인들이 찾아와서 "별일 없지?", "건강하지?" 대화하고 갈 때, 커피라도 한 잔 할 때 좋지요."

가게에 찾아오는 이들 덕분에 일의 고단함, 일상의 심심함을 덜어내고 있다.

"진천에서 모임 8개 이끌어가면서 재밌게 살고 있어요. 모임의 회장도 하고 있고, 자율방범대에서 20년간 활동했어요. 자원봉사도 간간히 하고 있어요."

지금 이대로가 좋다는 그는 "80세까지는 가게를 하고 싶다"고 바랬다. 그에게 '진천구두병원'은 어떤 의미일까.

"나한테는 '그림자' 같아요. 나하고 평생 함께 해왔으니까, 앞으로도 꼭 붙어있을 거니까."

"나날이 발전하는 구두병원입니다." 그가 전화를 받을 때 건네는 인사멘트다. 나날이 발전하는 가게가 되고 싶은 원광수 사장의 마음이 오늘도 가게를 조금씩, 천천히, 오래오래 발전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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