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민정 수필가

괴산군에서 생산되는 괴산대학찰옥수수가 출하시기를 맞아 구입문의가 잇따르는 등 인기가 높다./ 괴산군청 제공
괴산군에서 생산되는 괴산대학찰옥수수가 출하시기를 맞아 구입문의가 잇따르는 등 인기가 높다./ 괴산군청 제공

[중부매일 아침뜨락 김민정] 지인이 보내준 옥수수가 자루를 뚫고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이 싱싱하다. 진한 초록 잎맥의 결이 거친 옥수수 하나를 얼른 꺼낸다. 고향의 향기가 물씬 풍겨 나온다. 잎의 끝자락을 잡고 껍질을 벗기기 시작한다. 여인의 한복 속곳만큼이나 칭칭 동여맨 껍질은 얼마나 야무진지 여민 품을 여간해서는 속을 내주지 않을 기세다. 어차피 보여 줄 알몸인데도 조바심이 난다. 손(?)을 탈까 거칠게 동여 맨 검푸른 겉옷은 여지없이 나의 손에 의해 적나라하게 벗겨진다. 마침내 다 벗고 드러난 하얀 알갱이, 촘촘하고 고른 열(列)로 빈틈이 없다. 알알이 빛나는 모습이 진주알 같이 실(實)하게 영근 하얀 옥수수가 식욕의 욕망을 채운다.

어려서부터 옥수수를 퍽이나 좋아했다. 5월, 완연한 봄이 오면 옥수수 파종이 시작됐다. 하룻밤에도 몇 뼘씩 자라는 이파리는 길게 뻗어 양쪽으로 늘어져 병사의 열병식을 보는 듯했다. 초여름 따끈한 햇살에 파종한지 60일이 지나면 압도적인 길이와 완벽한 비율의 늘씬한 품속에서 싱싱하고 푸릇푸릇한 옥수수는 붉고 반짝이는 수염을 내민다. 붉은 수염을 보면 생명이 피어나는 것 같아 가슴이 벅차오른다. 월광에 빛나던 고향 텃밭에 기억과 계절의 푸르름 속에서 순수와 안정감이 되살아난다.

이제 보름만 참으면 쫀득하고 밀크 캔디 향내가 나는 옥수수를 먹을 수 있다는 설렘으로 마음도 따라 춤을 춘다. 6월 중순이 되어서야 옥수수는 금값으로 마트에 선을 보이기 시작한다. 눈길이 온통 옥수수로 가있지만 비싼 가격 탓에 보름을 더 기다려야만 한다. 그 기다림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몇 개 사들고 와서 쪄 먹어보지만 향과 맛이 이미 저만큼 달아난 탓에 살짝 실망한다. 산지에서 마트로 오기까지 과정은 적어도 하루 이틀이 지나기 때문이다. 옥수수는 따내는 즉시 쪄야 당도와 밀크향이 그대로 살아있다. 그러나 옥수수를 너무 사모한 탓에 이것마저도 꿀맛이다.

드디어 옥수수 출하가 시작이 되면 괴산으로 달려간다. 이글거리는 태양아래 끝없이 펼쳐지는 옥수수 밭은 푸른 바다이다. 도로변을 달리다 보면 찐 옥수수와 포대자루에 담긴 옥수수가 기다리고 있다. 맛 뵈기로 내미는 농부의 푸짐한 인심이 덤으로 즐거움을 선물한다. 어떤 간식과도 비길 수 없는 이 맛, 살인적인 여름도 옥수수 먹는 맛에 견뎌 낼 수 있는 것 같다.

김민정 수필가
김민정 수필가

미국 인디언 부족들은 추장의 딸들이 성숙해지면 옥수수 밭으로 데리고 가서 결혼에 대한 인생교육을 받게 한다고 한다. 지정된 밭고랑에서 가장 좋은 옥수수를 하나만 따오라는 지시를 받게 되는데 한번 지나친 옥수수는 다시 쳐다 볼 수도 없고, 단 한번 내디딘 걸음을 후퇴할 수 없이 계속 앞을 향해 나가면서 마음에 드는 옥수수를 고르는 일이다, 그런데 밭을 나온 딸들 손에는 하나같이 작고 보잘 것 없는 옥수수가 들려있다고 한다. '왜 그럴까', 초반에는 탐스러운 옥수수가 나와도 ' 좀 더 가면 더 좋은 옥수수가 있겠지'라는 기대감에 선뜻 따지 못하다가 결국 마지막에서야 초조한 마음에 아무 옥수수를 따서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빈손이라면 평생 처녀로 살아가야 한다는 걱정 때문이다. 즉, 옥수수는 신랑감을 말한다.

뒤돌아보면 좋은 사람을, 좋은 기회가 바로 앞에 있는데 만족하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이상에 눈이 멀어 욕심을 부리다가 놓진 적도 있다. 그러나 후회하지는 않는다. 지난 일들은 모두가 자신만의 업적이다. 옥수수 삶은 냄새가 집안에 가득 찬다. 뽀얀 진주알을 한입 물어뜯는다. 맛이 포로가 된 지금, 여름내 사모했던 옥수수 맛을 몸과 마음에 깊숙이 저장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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