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천의 최상류 '환경운동'의 상징으로 자리매김
달천의 최상류 '환경운동'의 상징으로 자리매김
  • 이지효 기자
  • 승인 2018.08.01 17: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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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래강123리포트] 7. 괴산 청천면
온천개발 저지·허가 취소…환경 지킴이 기념비 건립
귀만리 '거북이상·장승'…선평리 미원천 하류 마을
후평리 방풍림과 달천.

#달천과 신월천 사이에 자리 잡은 귀만리

미원면 어암리 박대소를 지나면 달천은 자연스럽게 청천면 귀만리로 들어선다. 귀만리로 가려면 삼인교를 건너야 한다. 삼인교는 어암리 소바위와 귀만리 삼인동을 연결해 준다. 귀만리는 삼인동(三仁洞), 원귀만, 가락골로 이루어져 있다. 삼인동은 새민이로 불리기도 하는데, 산과 물 그리고 사람이 좋은 동네라는 뜻을 지녔다고 한다. 삼인동에는 교하노씨들이 많이 사는데, 그 때문에 입향조 학포(學圃) 노정한(盧定漢: 1615-1679)을 기리는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삼인동을 지나 한들에 이르면 37번 국도를 만나고, 청천방향으로 가면 달천에 놓인 장평교를 건너게 된다. 그러나 귀만리 마을로 가려면 다리를 건너지 말고 달천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북쪽으로 가야 한다. 길은 신월천이 달천에 합류하는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이어진다. 이 길이 귀만길이다. 귀만길은 귀만리 마을회관 앞으로 이어진다. 마을 입구에 큰 느티나무와 석장승이 있다. 장승은 두 기로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다.

장승이 길의 왼쪽에 있다면, 길 오른쪽 암벽에는 구만동천(龜灣洞天)과 만포정(晩浦亭)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구만동천은 거북이 사는 물굽이 동네라는 뜻이다. 거북이는 십장생 가운데 하나로 상서로움과 무병장수를 상징한다. '거북이의 느린 삶처럼 여유로운 마음으로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만들겠다'는 생각이 담겨있는 것 같다. 그래선지 마을 입구에 거북이상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만포정은 늦게 찾아온 물가 정자라는 뜻으로, 귀만리(歸晩里)라는 마을 이름과 연결되는 것 같다. 우암 송시열 선생이 이 마을이 길지라는 것을 깨닫고 퇴임 후 돌아오려 했으나, 이미 늦어 돌아오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런 뜻으로 정자를 지었으나, 그것이 후대에 없어지면서 그 이름만 남았을 것이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2009년에 만든 돌거북이상과 십여 기의 나무 장승들을 볼 수 있다. 귀만리에는 죽산박씨들이 많이 산다.

원귀만에서 신월천에 나 있는 가락교를 지나면 가락골이 나온다. 가락골이라는 이름은 주민들의 삶이 아름답고 즐거워(佳樂) 생겨났다고 한다. 가락골의 다른 이름은 한천(寒泉)이다. 마을 한 가운데 얼음처럼 찬물이 있어 그런 이름이 붙었다. 가락골은 평양조씨의 세거지로 표지석까지 세워져 있다. 그리고 평양조씨 입향조를 모신 사당 한천사(寒泉祠)가 있다.
 

#강평리와 선평리는 이름처럼 들판 마을

환경문화지킴이 '장승'

강평리는 달천의 서쪽 37번 국도를 따라 펼쳐진 마을이다. 강평리라는 행정명칭은 강호(江湖)와 대평(大坪)이라는 마을 이름에서 나왔다. 강평리는 한때 현청이 있던 곳으로, 호주(湖州)골, 향교(鄕校)골, 옥(獄)배미 같은 옛 이름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호주골탑, 망경대, 고운암에 관한 이야기와 전설을 통해 그 역사를 짐작할 수 있다. 강평리의 역사를 기록한 동계(洞契)문서로 강호리계좌목(江湖里?座目)이 남아 있다.

겉장에 보면 강호리 계가 처음 조직되어 좌목을 만든 것이 1638년(戊寅)이다. 1673년(癸丑) 장부를 다시 만들었으며, 현재 전하는 것은 1699년(己卯) 10월 중수(重修)한 것이다. 이 책에는 그 후 1986년까지 동계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좌목 내부에는 산제사(山祭祀) 축문, 모임의 회칙인 입의(立義), 계원들의 성금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선평리는 미원천의 가장 하류에 있는 마을이다. 그러므로 마을의 끝에서 미원천이 달천과 합류한다. 이 합류지점 남쪽에 환경문화전시장이 세워졌는데, 그것은 1992년부터 시작된 문장대 용화온천 저지 성공을 기념하는 의미가 있다. 선평리 197번지 일대 2천평의 부지에 조성된 청천 환경문화전시장은 전시관, 상징조형물, 돌탑, 기념비, 정자, 장승, 솟대, 물레방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념비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청천은 수려한 자연경관과 청정계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분별없는 개발논리와 이기주의로 속리산 자락에 문장대와 용화온천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달천의 최상류에 온천을 개발한다는 것은 환경의 소중함을 망각한 안타까운 일이다. 청천면민, 괴산군민, 충북도민, 환경단체는 하나로 뭉쳐 개발저지와 법정투쟁에 나섰다. 그 결과 온천개발이 저지되고 허가가 취소되었다. 환경운동의 성공을 자손만대 전하고자 환경지킴이 기념비를 세운다.

상징조형물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단부의 돌산은 속리산국립공원의 여러 산은 상징한다. 이들 가운데 우뚝 솟은 두 개의 기둥은 괴산군민의 환경보존 의지를 표현한다. 이 기둥이 역삼각형의 끝으로 모인 물방울을 받치고 있는데, 이 물방울이 하나로 모인 환경운동의 힘(Energy)을 상징한다. 그 위로 비둘기 나는 지구가 있고, 손을 잡은 사람들이 원을 그리며 돌고 있다. 여기서 지구는 평화, 사람은 화합과 단결을 의미한다.

돌탑은 도원리에 도원성 조각공원을 만든 홍익대학교 고승관 교수가 디자인하고 제작했다. 이 탑은 돌로 산(山)을 형상화했다. 탑속에는 온천개발 저지투쟁 기록이 담겨 있다. 그래서 탑의 명칭이 Time Capsule Nr.12다. 장승도 있는데, 상류쪽에 11개, 하류쪽에 44개가 세워져 있다. 상류 11개는 괴산군 11개 읍면을 상징하고, 하류 44개는 청천면 44개리를 상징한다.
 

#현대사의 불행한 인물 후평리에서 탄생

이기붕 前부통령

달천을 끼고 강평리와 선평리 맞은편에는 후평리가 있다. 우리말로 뒤뜰이 되는데, 들판 뒤쪽에 형성된 마을이라는 뜻이다. 청천면에서 논 면적이 가장 넓은 곳이다. 마을 앞 하천변으로 방풍과 휴식의 개념으로 방품림을 조성했다. 이곳 후평숲은 야영장 겸 유원지로 많은 사람이 찾고 있다. 후평리에는 물과 바위가 조화를 이룬 만경대(과거 옥화구곡 중 제1경)가 있었다고 하는데, 어느 곳을 말하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후평리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곳이 이기붕(李起鵬: 1896-1960) 부통령의 고향이라는 사실이다. 이기붕은 후평리 299-3번지에서 판사(判事) 이낙의(李洛儀)와 어머니 은진송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기붕은 세 살 때 가족과 함께 서울 노량진으로 이사했고, 일곱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살았다. 그러나 그는 선교사와 당대 지식인들의 도움으로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다음 1934년 귀국하여 사업에 종사했다.

그는 1945년 해방 후 이승만의 비서로 활동하면서 정치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1948년에는 이승만 대통령 비서실장이 되었고, 1949년에는 서울시장이 되었다. 그리고 1951년에는 자유당 창당에 참여하면서 당정의 핵심인물로 부상한다. 그러나 1954년 그가 민의원 의장으로 있을 때 사사오입개헌을 통과시키면서 정치적인 악역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기붕은 결국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불행한 인물이 되고 말았다. 민의원 의장과 부통령을 지내면서 자유당 정권의 부정과 독재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1960년 3·15부정선거를 통해 이승만과 이기붕이 정·부통령이 되었으나, 이 선거로 인해 민심이 완전히 돌아서고 말았다. 4·19혁명이 일어났고 부통령에서 물러난 그는 4월 28일 경무대 별관에서 자살했다. / 이상기 충북학연구소 객원연구원, 중심고을연구원장,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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