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역사는 용서와 사랑으로 시작된게 아니라 분노와 질투로 시작되었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 난 것은 하느님의 분노에 의한 것이고 그의 아들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것은 인간의 질투에 의한 것이다.
이를 기독교에서는 '원죄론'이라 한다. 그 원죄론 때문인지 카인의 후예인 인간사회에는 사랑의 목소리보다 질투의 심리가 더 많이 작용한다. 질투는 사랑의 또다른 변형인데 그 파장은 인간세계를 병들게 하고 있다.
프로이드와 쌍벽을 이룬 칼 융이 지적했듯 질투는 가까운 사이, 심지어는 가족사이에도 존재한다. 왈츠의 대부, 요한 스트라우스 부자(父子)는 심한 갈등을 겪었다. 아버지 스트라우스는 자기보다 아들 스트라우스가 훨씬 유명해지자 '그것도 음악이냐'는 식으로 아들을 질투하였다.
그러나 아들 스트라우스는 승업(承業)을 하였다. 오늘날 연주되고 있는 주옥같은 곡들은 거의가 아들 스트라우스의 작품이다. 태조 이성계와 아들인 태종 이방원간에도 심한 갈등이 존재하였다. 이성계는 왕자의 난을 일으켜 이복 동생들을 죽인 이방원을 미워하여 함흥에서 한동안 은둔하며 나오지 않았다. '함흥차사'란 여기서 연유된 말이다.
미움의 장벽은 참으로 헐기가 어려운 모양이다. 자기보다 잘 난 사람이 있으면 키워주는게 아니라 어떡하든 해코지를 하여 격상된 위치를 끌어내리고 싶은게 사람의 보편적 심리다.
'내가 망하는 한이 있어도 네 잘난 꼴은 못봐준다'든지,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는 '제로 섬 게임'의 심리적 양상은 결국 지역사회 발전의 걸림돌로 작용하면서 부머랭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특정인사가 성공하여 금의환향이라도 할라치면 격려하고 박수를 보내야 하는데 내면적 심리는 전혀 딴판으로 작용하기 예사다. '개천에서 용났네, 코나 찔찔 흘리고 나한테 얻어 맞기나 하던 것이 말이야..'하는 식의 질투심리를 엿보게 된다.
전통적으로 농경공동체를 이뤘던 충북사회에서 이런 현상은 더 심각하게 목격된다. 잘난 사람을 따라 잡으려는 '상향 만족형' 경쟁심리가 아니라 자기의 수준으로 끌어 내리려는 '하향 불만족형' 평등심리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역사회의 네가티브적 한 특징은 목전에선 한마디도 못하면서 뒤통수를 치는 일이 허다하다는 점이다. 불명예스럽게도 충북의 투서는 전국 상위권에 랭크된다. 투서 많고 모함많은 지역사회에서 어찌 인재가 나겠는가.
그래서 충북사회에서 돈을 벌거나 성공한 사람들은 하나 둘, 청주를 떠나고 있다. 여기서 더 있다간 큰 코를 다친다는 위기의식 때문이다. 이같은 현상에는 청주의 지세가 배가 떠나는 행주형(行舟形)이라는 풍수지리도 한 몫 거든다. 배에 짐을 가득 실으면 가라앉는다는 것이다.
이로보면 충북지역사회는 '인재 키우기'가 아닌 '인재 죽이기'에 몰두하지 않았나 하는 심정도 일면 느끼게 된다. 다른 고장에서 '인재 키우기'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우리는 마주 달리는 기차처럼 그 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지역사회의 발전이 더딘 이유중의 하나는 바로 여기에 있다. 중앙부처로부터 예산을 끌어올 때면 이제 부대낄만한 곳도 별로 없다고 한다. '충북출신 인재가 없다' '충북 푸대접이다' '1급 공무원이 없다'라고 푸념만 할게 아니라 지금부터라도 '인재 죽이기'를 청산하고 '인재 키우기'에 힘을 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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