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모임득 수필가

치자꽃 / pixabay
치자꽃 / pixabay

[중부매일 아침뜨락 모임득] 기억은 시공을 초월하여 불쑥 다가온다. 치자꽃 향기를 맡는 순간, 이십여 년 동안 잊고 지냈던 기억의 편린들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삼십대 젊은 나이에 어린 아들과 투병 중이던 언니가 한송이 치자 꽃처럼 다가왔다. 맑은 피부를 가졌던 그 언니 집에서 치자나무를 보기 전까지 치자 꽃은 노란색인줄 알았다. 치자물 들인 음식이 노란빛이라 꽃도 노란색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향을 맡고 또 맡으며 재차 꽃이름을 확인하였다. 유백색의 꽃향기가 참 좋았다.

언니는 폐암말기 환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항상 치자꽃 미소를 지었다. 비요일의 만남이라고 하여 비가 오는 날이면 글동무 너댓 명은 약수터로 모였다. 동동주 한잔에 파전을 안주삼아 빗소리 들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찌개에 서로의 수저가 들락날락할 때면 시험관 아기 시술하러 병원에 다니던 나는 왠지 마음이 불편했다. 한번은 그런 내 마음을 눈치 챘는지 일행 중 한 명이 그 언니가 먹다가 남긴 국물을 보란 듯이 벌컥벌컥 들이키기도 했었다.

임신에 성공해서 전화하였다. 자기일 만큼이나 무척 반가워하는 언니. 내게 아기를 점지해 달라고 기도를 많이 했단다. 참 부끄러웠다. 한참 후에 내가 병간호를 할 때 생각해 보니 그 언니는 병원에 가서 항암치료 받고 나면 일주일 동안은 항암후유증으로 투병하고, 그 다음 일주일 컨디션이 그나마 좀 괜찮을 때 우리를 만난 거였다.

핏기 없는 언니의 얼굴빛 같은 치자 꽃은 불볕더위와 장맛비를 견디고도 여름이면 꽃을 피워낸다. 자신의 향기를 조금이라도 늦추지 않고자 꽃은 자기의 소임을 다하고 있음이다. 그럼에도 빨리 시들어 오래가지 못하는 꽃이라 더 애달프다.

치자 꽃은 칠월이 되면 여인네의 뽀얀 젖가슴마냥 흰 꽃이 절정을 이룬다. 그래서인지 칠월이 되면 이해인의 시가 떠오른다.

7월은 나에게/ 치자꽃 향기를 들고 옵니다// 하얗게 피었다가/ 질 때는 고요히/ 노란빛으로 떨어지는 꽃// 꽃은 지면서도/ 울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무도 모르게/ 눈물 흘리는 것일 테지요? -<7월은 치자꽃 향기 속에>중에서-

한여름 치자꽃 향기는 가슴을 설레게 한다. 치자의 달큰한 향기, 순결해 보이는 순백의 치자는 일랑일랑의 향기처럼 농염한 냄새가 난다. 첫날밤을 기다리는 신부 같은 꽃이다. 자스민 향기도 관능적이다. 치자 꽃도 자스민의 한 종류이다. 코의 점막을 타고 퍼져가는 향은 감탄사가 절로 나오며 벌름거리게 한다.

모임득 수필가
모임득 수필가

치자꽃 꽃말은 청결, 순결, 행복, 한없는 즐거움이라 하는데, 난 순백색 꽃을 보면 그리움이 떠오른다. 청결하고 순결했던 언니는 폐암을 극복하지 못하고 갔다. 삼십대 짧은 인생이 서러웠다. 잊고 지냈던 언니의 유고시집 <들꽃을 보며>를 꺼내 보았다. 초등학교 아들이 썼던 글에 눈길이 머문다. 이 세상에 엄마가 무지개 타고 오셔서 일 년만, 한 달만, 하루만이라도 오셨으면 좋겠다는 글을 보고 한참을 눈물 흘렸다. 그때 임신했던 우리 아이들이 스무 살이니 그 언니 아들은 투병하던 언니의 나이쯤 되었으리라.

꽃은 여름이면 피어 치자꽃내음 향기롭기만 한데, 이십년 전에 간 언니는 추억 한 움큼 속에 있다. 추억과 인생 사이에서 꽃향기로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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