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매우 가까운 여성 친구 한사람을 잃었다. 중고등학교 동창으로 만나서 35년을 넘도록 우정을 이어 온 친구인데, 그만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에는 많은 동창들이 모였고, 또 같이 슬픔을 나누었다.
 그런데 사실 우리 모두를 슬프게 했던 일은 그 친구의 죽음보다는, 삶이었다. 21세기에 어울리지 않을 서러운 이야기는 전통사회의 내 어머니, 할머니의 삶이었던 것이었다. 가정에 무책임한 남편을 만나 짧지 않은 시간을 살면서, 무조건적인 복종, 남자 중심의 경제생활, 친정과 멀리하기를 바라는 전근대성 등의 어려움을 다 경험하고 간 삶이었다. 사회의 부정적 시선으로 불가능한 이혼, 유일의 희망인 자식의 미래, 그리고 운명을 순종해 보려는 자존심의 복합적 작용의 결과가 바로 그녀의 죽음이었고, 이것이 우리를 더욱 슬프게 만든 것이다.
 오늘날 시민사회에서 여성문제는 중요한 시민운동 분야이다. 여성의 권익을 옹호하는 여성운동은 어찌보면 사회운동이라기 보다 이익단체 활동에 더 가깝다. 그러나 사회운동의 의미가 사회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공공선의 추구활동이라는 점에서, 여성의 불평등 지위를 바로 하려는 여성운동도 사회정의 실천운동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우리사회의 여성운동 수준은 이미 상당하여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그 중심에 있는 분들은 사회지도층으로 진입해 있으며, 그 영향력은 상상할 수 없이 큰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여성운동의 결과는 사회 구석구석에서 발견된다. 호주제 개선, 여성근로자들의 산전 산후 휴가 확대, 사회공직자 여성할당제 도입 등 개선의 여지가 있는 많은 분야에서 여성운동은 사회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장관에 발탁되는 여성들이 능력을 십분 발휘하고 있는 것도 여성운동에 힘입은 바 크며, 총리지명자를 탄생시킨 것도 여성운동의 결과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이러한 여성운동 방향에는 두가지 중요한 사실이 간과되고 있다. 운동의 초점이 지나치게 엘리트 여성들에 모아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과 남성이 투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하고자 하는 여성의 수는 많으나, 이미 고용되어 산전산후 휴가를 누릴 여성은 상대적으로 적다. 산전 산후휴가를 늘리기 전에, 일하고자하는 여성의 고용을 확대하는 노력이 먼저 있었어야 하지 않을까. 장관의 위치는 이미 남성과 경쟁해야 하는 위치이므로, 여성이라는 의미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운동이 다수의 여성 대중에 더 기울어야 할 때라는 생각이다.
 또한 우리사회에서 여성과 남성은 영원한 동반자, 협력자여야 한다는 점이다. 내 안사람은 나로부터 지원을 얻어 사회활동이 가능하며, 여성장관은 남성과 함께 하는 사회에서 능력을 발휘해야 비로서 장관으로 인정을 받을 수있다. 장상 총리지명자가 여성의 몫으로서가 아니라 남성들과 경쟁한 능력있는 인사로 인정받았다면 인준에 실패했을까?
 향후 여성운동은 대중으로서의 여성문제가 초점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 투쟁은 남성들과 함께 추진해가야 하며, 내 두딸이 여권이 신장된 사회에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남성인 내가 참여할 틈이 주어졌으면 좋겠다.
 평범한 여성의 여권신장을 바라고 있을 먼저간 친구의 명복을 빌면서 몇자 적은 것이 어리석은 넋두리가 아니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 김 도 태 충북대정외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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