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흥덕사에서 고려 우왕 3년(1377)에 찍어낸 ‘직지심체요절’이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이라는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한때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가 직지 아성에 도전장을 낸바 있으나 다시 찍었다는 간기의 중조(重凋) 부분 해석이 엇갈리면서 잦아든 상태다.
 직지는 1972년 파리에서 열린 ‘세계도서축제’에서 독일의 구텐베르그 활자보다 앞선 금속활자본으로 공인을 받은데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는 책 문화, 정보문화의 대부다.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이라는 문장 앞에 ‘현존하는’이라는 수식어가 접두어처럼 붙어다니는 것은 그 이전에도 고려의 금속활자본인 ‘고금상정예문’(1234년) 등이 있었으나 현재까지 전하지 않고 다만 ‘직지’하권만이 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청주에서 직지보다 72년 앞서 찍은 목판본 금강경(金剛經:원제 금강반야바라밀경)이 3년전쯤 나타났다. 20세기의 끄트머리인 1999년 12월, 청주 예술의 전당에서는 ‘직지와 한국 고인쇄문화’라는 주제로 세미나가 열린바 있다.
 이자리에는 경북대 남권희 교수가 참석하였는데 그는 청주 원흥사(元興社·元興寺)에서 찍은 금강경의 실체를 필자에게 귀뜀했다. 비록 목판본이긴 하나 청주가 ‘직지’와 더불어 인쇄문화의 메카임을 또한번 증명하는 귀중한 자료다.
 이 금강경은 고려 충렬왕 31년(1305)에 찍은 것으로 단순히 연대만 비교하자면 '직지'보다 72년 먼저 인쇄된 것이다. 육구거사(六具居士) 박지요(朴知遙) 등의 발원으로 인쇄한 이 금강경은 간기에 청주목 원흥사에서 목판본으로 다시 찍었음을 밝히고 있다.
 크기 27.1cm×16.3cm 크기의 비단 장정으로 돼 있는 이 금강경은 서문, 본문, 후서를 포함하여 모두 51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간기에 ‘대덕구년(大德九年·1305)’이라는 절대연대와 ‘고려국 청주목 원흥사 개판(開板·다시 찍음)’사실을 명기하고 있다.
 이 책은 조계종의 육조(六祖)인 혜능(慧能)이 번역(한역)하고 천태종의 나적(羅適)에 의해 원풍(元豊) 7년(1084)에 쓰여진 것을 1305년 박지요 등의 발원으로 청주에서 다시 찍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을 인쇄한 원흥사는 어디에 위치한 절일까. 확실히 규명된 것은 없지만 1994년 충북대박물관에서 실시한 산남동 일대 지표조사에서 옥개석, 탑신석 등 탑 부재 일부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모 주유소 뒷편일 가능성이 크다는게 학계의 대체적인 견해다.
 여기에다 인근에는 요즘 보호의 논란이 일고 있는 ‘원흥이 방죽’이 있고 조선 후기에 간행된 청주목 지도에 ‘원흥제(元興堤)’가 등장하고 있어 그 연계성을 따져봐야 할 것 같다.
 산남동 일대의 택지개발도 좋지만 ‘원흥이 방죽’은 청주 마지막 두꺼비 서식처요, 고인쇄문화를 빛낼 ‘원흥사’추정 절터의 존재 개연성이 있는 만큼 역사환경, 생태환경을 먼저 고려한 다음 개발하는 것이 수순일 것이다. 원흥사지가 택지개발 과정에서 절터의 절반 가량이 잘려나간 제2의 흥덕사지가 되지 않도록 개발의 삽질을 잠시 멈추고 발굴조사를 먼저 실시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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